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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꿍 Feb 11. 2020

13. 그레고리, 너의 탄생을 축하하며

얼떨결에 '엉클'이 된 이야기

퇴근을 하고 근처에서 장을 보는데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정말 반가운 얼굴,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얼마간 홈스테이를 했었고 그 집의 마마였다. 거리에서 대뜸 혼나기부터 했다. 주말, 크리스마스 등 초대를 받을 적마다 이런저런 핑계로 그동안 한 번도 가지 못했었고, 마마는 그런 내게 내심 서운해했다. 나는 다가오는 토요일에 꼭 가겠다며 약속을 하고 그 상황을 모면했다.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설렘을 가득 안고 집을 나섰다. 한국에서 받은 커피믹스와 아이들에게 줄 과자, 사탕을 챙기고 가는 길에 시장에서 과일을 사서 예전에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문을 두드리니 아이들이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줬다. 그런데, 소파에 조그마한 녀석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몇 초 간 무슨 상황인가 싶다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처음 여기 왔던 7월에 마마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고 어느새 이 조그만 녀석이 태어난 것이었다. 정말이지  반가웠고 미안했다. 그때 나는 딸을 갖고 싶다는 가족의 말에 뱃속 아이에게 한국 이름을 지어줬었고 꼭 보러 오겠다는 말을 했었다.

곤히 자는 걸 깨워서 심통이 나 있다.

아기의 이름은 그레고리, 남자아이가 태어나서 집 안에 남자아이만 3명이 됐다. 2개월밖에 되지 않아 나를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발바닥을 간질이든 안아주든 나를 빤히 쳐다만 봤다. 반짝이는 눈동자에 나는 홀딱 빠져 가족과 얘기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마냥 아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조그만 생명을 품에 안을 수 있어 행복했고 다행이었다. 제 것인 양 내 손가락을 꼭 쥐고 놓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일찍이 너를 보러 올 수 있었는데 싶어 아쉬운 마음이었다.

아기와 노는 동안 마마가 점심을 차려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필라우와 바나나 요리 등 여러 음식을 준비했고, 오랜만의 집밥에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바바는 예전처럼 젓가락을 꺼내 여전히 못 하는 젓가락질을 보여줬다. 첫째 링컨은 그새 영어가 입에 붙었고 둘째 가브리엘은 올해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갔다며 새로 산 가방을 자랑했다. 가족들은 내가 예전에 지어 준 아기의 한국 이름과 같이 요리해 먹었던 찜닭과 계란말이를 단어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실컷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밖은 해가 저물었다. 이따금 들려서 아기와 놀기로 약속하며 일찍이 집을 나섰다.


오랜 친척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적당히 외로운 틈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기억의 밀도는 저마다 달라서 난 아기가 태어날 것도 까맣게 잊었고 가족들은 나와 있었던 하루하루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새 아기의 엉클이 되었고 시내에서 봤던 아기 옷 상점에 갈 일이 생겼다. 그레고리, 조금 늦었지만 너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해. 다시 만날 때까지 잘 먹고 건강하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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