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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꿍 Feb 20. 2020

14.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정전이다. 낮부터 정전이 되어 밖에 나가 밥을 먹었고, 이른 저녁에 장을 봐 들어왔지만 여전히 정전이라 일찍 침대에 숨었다. 해가 저물고 나면 의지할 것이라곤 침대 머리맡에 둔 조그만 스탠드가 전부다. 소파에서 책을 읽자면 어디선가 나타난 모기가 못 살게 굴어 갈 곳이라곤 침대뿐이다. 전기가 끊기면 물도 끊겨 땀을 뻘뻘 흘리며 스탠드 불빛에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다 그 불빛마저도 덥게 느껴져 일찍 잠을 청한다.


그런 날엔 꼭 새벽 일찍 잠에서 깬다. 어떤 날은 너무 오래 누워있다 허리가 쑤셔서, 어떤 날은 더위에 지쳐 잠에서 깬다. 잠은 벌써 저만치 달아난 깜깜한 새벽, 나는 별의별 생각에 잠긴다.


이 생활에 익숙하지 않던 날에 나는 두 번 다시는 더운 나라에 살지 않겠다고, 전기가 말썽인 나라에서도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저녁밥을 짓지 못해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배가 고프던 날에,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의 결핍에 나는 우울했었다. 종일 땀 흘리다 돌아온 집에서 쉴 수가 없던 날 혼자 남겨진 나는 그만 돌아가고 싶었다. 감정은 어찌나 쉽게 비뚤어지는지, 한국의 친구들은 당연했고 같이 활동하는 봉사자 선생님들의 고충을 들으면 마냥 배부른 소리 같아 많이도 미워했다. 나는 나를 미워할 수가 없어 애꿎은 타인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혼자가 되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 중 하나. 하루를 살면 좋은 일이 훨씬 많다. 좋은 일은 당연하게 여기고 안 좋은 일만 생각하던 때에 나는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행복은 정작 눈에 보이지 않아 많이도 놓쳤다. 아픈데 없이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해 저녁을 짓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났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나를 다잡는다.


오늘 나는 적당히 타협하며 지낸다. 여전히 감정엔 어설퍼서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나쁘지 않다. 긴 새벽에 갇혀 있던 날엔 세상에서 나만 힘들고 나만 안타까웠다. 오늘 새벽엔 내일을 생각한다. 내일 할 일과 먹을 것을, 만날 사람을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마음먹기 나름. 이 새벽, 분명 행복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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