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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혠나날 May 03. 2022

이상한 나라의 시계토끼

"우리는 느리게 걷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분홍 눈의 하얀 토끼가 회중시계를 들고는 "이런, 큰일 났군. 이러다간 늦겠어" 하며 허둥지둥 앨리스 옆을 지나친다. 그 토끼를 따라가다 앨리스는 토끼굴로 떨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하얀 토끼는 공연히 아주 바쁘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 요즘의 나는 스스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 속 흰 토끼 같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시간을 체크하고, "늦었네. 이러다간 늦겠어!"를 남발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은 예정에 없던 반반차를 내고 2시간 일찍 퇴근을 했다. 며칠 전부터 아파오던 치아 때문이었다. 급하게 치과를 예약하고 진료를 받았으나 결과는 놀랍게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어 이런저런 질문을 했지만 그 어떤 충치의 징후도 잇몸의 염증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너무 의아했지만 일단 치과를 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일정을 마친 나는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내려다본 양재천을 떠올렸다. 싱그러운 이파리와 느린 개울물은 이 순간도 놓쳐버릴 것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양재천에 내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시간대의 풍경이었다. 새롭게 피어난 생명들이 가득해 공기마저도 가벼운 연두색을 띤 것 같았다. 개울 건너편에는 노란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 피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반지의 제왕 속 호빗마을처럼 평온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풍경을 눈앞에 두고서도 내 이빨이 도대체 왜 아픈지, 조만간의 인사이동은 어떻게 될는지, 오늘은 헬스장에서 어떤 운동을 할지, 내일 하루는 어떻게 보낼지 정신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노래도 듣지 않으며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에도 자꾸만 시계를 흘끔거렸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도 괜찮을지 머릿속에서 회중시계를 돌려보며 살짝 불안해했다.




 


 나는 공연히 바쁘다. 생산적인 것이 많이 없음에도 뭔가를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어렵다. 할 일이 많으니 항상 시계를 본다. 출근을 할 때도, 출근을 해서도, 퇴근을 하고 나서도, 잠에 들기 직전까지 시계를 끊임없이 바라보며 "늦겠네. 늦겠어"를 외친다. 내가 세운 일정을 모두 소화하려면 시계처럼 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렇게 칸트처럼 시간을 보내는데 큰 만족감을 느끼기에 뿌듯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은 예기치 않게 나의 오래된 친구가 집에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날도 역시 내가 세운 계획들이 포도처럼 알알이 딸려있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친구를 위한 시간을 억지로 떼어내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를 집에 두고 헬스장에도 다녀오고, 영어공부도 하고, 책도 읽었다. 12시가 다 되어갔다. 나는 그제야 방문을 열고 친구를 마주했다. 친구는 이 집에 올 때 무엇을 기대했을까?

 우리의 지난 10년을 되돌아보고 싶었을 수도, 괜스레 이야기 나누지 않아 오해로 내버려 두었던 우리의 지난날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을 수도, 30대가 되어 살아갈 미지의 시간에 대해 도란도란 나누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날은 어쩌면 그이의 고되었던 날들과 나의 지친 날들을 함께 공유하며 더 깊은 유대감을 나눌 시간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후 4시, 영화속 한장면 같은 양재천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날이 생각났다.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분명 더 나은 내일과 성장하는 나 자신을 위한 일인데 어느 순간 시계토끼가 되어버렸다. 오래된 친구도, 평온한 풍경도, 퇴근 후의 일상도, 꿀 같은 주말에도 그저 시계를 똑딱인다. 마치 시간이 빨리 흘러버리는 다른 행성에라도 살고 있는 것처럼 앞만 보고 달린다.

 

나는 왜 이 멋진 풍경을 보고도 선물처럼 주어진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는지 내 스스로 지어 올린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제야 진짜 눈을 떠 내 앞에 놓인 순간을 바라보았다. 햇볕은 눈이 부셔 시릴 만큼 반짝였고, 개울물은 느리지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강물처럼 이 순간도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에세이를 읽다가 공감 가는 문장이 마음속에 남았다.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가 즉 꿈일 수 있겠는데 나는 그걸 기피하고 다만 시계처럼 하루를 보내기에 급급하다. (••)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이 기계처럼 살아서 어쩌겠다는 걸까." 나에게 건네는 인생선배의 충고처럼 다가왔다.


장기하의 <느리게 걷자>라는 노래를 좋아했던 나는 어느새 노래 가사 속 시뻘건 눈의 아저씨가 되었다. 어쩌면  <모모> 책에 나오는 회색신사집단에게 시간을 빼앗겨버린 현대 도시인일지도.


때를 지나쳐 온전한 토끼가 되어버리기 전에 적당한 균형을 찾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일상에 예기치 못한 시간들이 물들어 더 다채로운 색으로 빛날 수 있기를 바란다.

갓생*도 좋지만 평범한 인생도 너무나 소중하니까.



조금 덜 바빠지자,
조금만 더 느리게 걸어가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 갓생: 하루하루 계획적으로 열심히 살아내는 삶을 의미하는 신조어



오늘 눈에 담을 수 있었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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