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도전기]그때 그 언니들은
소유의 여행
그때 그 언니들은 뭐하고 살고 있을까. 소유는 종종 생각한다. 놀이터에서 처음으로 꽃반지 만드는 법을 알려줬던 언니는 어떻게 살까. 입만 열어도 웃음이 펑펑 터져나오게 웃겼던 동네 언니는 무엇이 되었으려나. 기숙사에서 만났던 룸메이트 언니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그리고 수 많은 언니들 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몇몇 언니들은 조금 더 오래 추억해보곤 한다.
대학생 때 만났던 솜이 언니는 소유보다 3살이 더 많았다. 솜이언니는 4학년이어서 그런지 말투도 단정하고 옷차림도 웬지 좀 멋졌다. 키가 작아서 소유보다 어려보였지만 깝죽거리는 남자선배들에게도 웃으며 응수하고 불쾌한 농담은 잘 갈무리하는게 확실히 어른다워 보였다. 소유는 솜이언니가 귀여운건지 멋진건지 헷갈려하면서 언니가 입을 열때마다 더없이 몰입하고 집중한 상태로 이야기를 들었다.
솜이 언니도 발이 미끄러진 사람이었다. 소유가 재학했던 대학교에는 국립대라는 특성탓인지 자기 성적과 머리에 비해 욕심을 부리지 않는, 안정지향적인 학생들이 곧잘 지원했다. 물론 거기엔 미래에 대한 계산과 가정형편에 대한 배려가 깔려있었지만 제 자신이 4년씩이나 작고 지겨운 도시를 견뎌야 한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잘못 발을 헛디뎌 원치 않았던 땅에 발을 내딛은 사람들처럼. 새내기 시절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절뚝거리며 학교를 배회했다. 솜이언니가 구체적으로 제 상황을 설명해준 적은 없었지만 소유는 언니가 도시와 캠퍼스를 답답해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동질감을 느꼈고, 좋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면 허리가 저절로 언니 쪽을 향했다.
솜이 언니는 새내기시절 아무 일정이 없는 날이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빠른 버스를 끊어서 무작정 다른 도시나 마을로 갔다. 여유가 되면 산책을 하고 여행을 즐겼고, 산과 길밖에 없는 동네를 만나버리면 마트에서 간식을 사서 등산을 했단다. 안그래도 조막만한 언니가 씩씩하게 산을 오르면 어른들은 어린친구가 기특하다며 오이나 바나나를 나눠주었고 언니는 싹싹하게 그 호의들을 씹어삼키면서 운동겸 여행을 마쳤다. 그렇게 몇번의 여행을 거치며 단단해진걸까.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언니는 제가 하는 공부에 확신을 가진 수험생이었고 그만큼 실력도 있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졌다.
소유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활 시절 종종 솜이 언니를 떠올렸다. 연초에 한해 진도 계획을 미리 다 세워놓고 하루치를 매일 성실하게 해냈다는. 자신이 매일 해냈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았다는 언니를 떠올리면 제 자신이 초라하고도 가엾어서 의지를 불태우게 됐다. 나도 이 도시를 떠나야지.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그렇게 되뇌이면서 수험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결국 소유는 지겹던 캠퍼스를 떠나 도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평택을 거쳐 수원으로 오면서 도시의 규모는 더 커지고 시끄러워졌고, 소유는 도시 생활이 잘 맞고 즐거웠지만 아주 가끔은 캠퍼스의 고요함이 그리웠다. 아침 산책을 나서면 안개가 자욱하던 거리가, 하루에 움직이는 차를 10대도 보지 못한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나날이,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면 다 세지 못하고 잠들 것 같던 밝은 별들이 떠올랐다.
그리움을 동력삼아 소유는 엉뚱한 결심을 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렇게나 버스를 끊어 다른 도시로 향하는 것 까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것 같았지만 시내버스를 타고 도시를 여행하는 정도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눈이 번쩍뜨여 아침 나절부터 기운이 넘치던 토요일에 소유는 무작정 짧은 여행을 결심했다. 여름의 습기를 날리려 코인세탁방에 가서 깨끗하게 이불을 빨아놓은데다, 어제 저녁에 사왔던 고로케도 맛있게 먹어치우고, 빨래 건조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으면서 느긋한 아침을 보냈더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치솟았던 터다. 그리하여 오전 10시 30분, 소유는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설레는 맘으로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짧은 기다림 끝에 눈 앞에 등장한 것은 62-1번 버스였다. 소유는 버스에 탑승하고 나서야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 이정표를 확인했다. 우연히 여행에 걸맞게 망포역, 영통역, 행궁동과 수원야구장을 거쳐 성균관대학교 근처까지 운행하는 노선이 아주 긴 버스였다. 영통역은 유흥가지 여행지가 아니니 탈락. 행궁동은 너무 많이 가본 곳이고 혼자하는 여행을 즐기기엔 너무 번잡스러우니 탈락. 수원야구장은 스포츠경기를 관람할 생각이 없으니 갈 이유가 없어서 탈락. 그럴듯한 이유가 다 지나가고 나니 결국 갈만한 곳은 성균관대 근처뿐이었다. 잠시 머릿속에 '지하철을 탔으면 30분이면 가는 곳인데 1시간을 걸려 가다니'싶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소유는 서둘러 잡념을 지웠다. 이건 여행이니까 사서 고생하는 과정도, 버스에 타서 처음 보는 길들을 구경하는 과정도 모두 중요했다.
역 근처에서 사람들이 제법 빠져나가고나자 소유는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소유는 기쁜 마음으로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들어 귀에 꽂았다. 이게 얼마만에 신곡을 듣는거더라. 소유는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막연하게 이것저것 신곡을 찾아듣던 시절이 너무 까마득한 예전처럼 느껴졌다. 차트 위에 떠있어서 눌러 듣는 것 말고, 내가 직접 검색해서 새로운 곡을 듣는게 얼마만이지. 왜 이 좋은 것도 못하고 살았지. 실리카겔, 터치드, 취향상점, 디어클라우드.. 소유는 신나게 연달아 새로운 곡들과 낯선 가수를 검색해가며 노래를 감상했다.
음악이 주는 기쁨에도 익숙해지자 새로운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근데 성균관대 주변에 뭐가 있더라. 소유가 수원에서 살기 시작한지도 1년 반이 되었지만 아직은 아는 곳 보다 모르는 곳이 더 많았다. 차가 없으니 더욱이 생활반경이 넓지 않아서 동네의 구석구석은 잘 알아도 그 밖의 곳은 깜깜했다. 어디쯤 왔는가 창밖을 바라보니 위치는 벌써 행궁동이었다. 소유는 지도 어플을 켜고 성균관대 근처를 샅샅이 훑었다.
성균관대에 가는 것도 나름 재미있겠지만 비오는 날 캠퍼스보다는 맑은 날이 낫지 않나. 만석공원은 생각보다 작아보여서 성에 안차고, 주변 산에 가자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떨떠름 했다. 결국 소유는 성균관대 수목원과 인근에 있는 일월 저수지를 택했다. 지도상 크기도 제법 크고 수목원과 공원도 바짝 붙어 있으니 나름 볼만하지 않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목적지를 정하고나자 목적없는 여행의 느긋함은 점점 줄어들고 어느새 조바심이 일었다. 이거 그래서 언제 도착하는거지? 토요일 아침 나들이가는 사람들로 길은 꽉 막혀있고 주변엔 처음 보는 아파트들이 많아서 소유는 저도 모르게 자꾸 부동산 가격을 검색했다. 그리고 90년대 준공된 아파트여도 역세권이면 4억은 줘야 한다는 것에 혀를 차다가 문득 의구심이 피어올라 손가락을 멈췄다. 이게 맞나? 솜이 언니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의문이 꼬리를 물기전 다행히 버스는 멈춰섰고 소유는 덜렁 낯선 동네에 도착해 버렸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덜컥 걱정부터 밀려왔다. 워낙에 길눈이 어두운데다 방향 감각도 무딘지라 고작 10분 거리에 있다는 저수지도 찾아가지 못할까봐였다. 다행히 사는 내내 길치였던 소유에게 고등학생 시절 친구는 이 정도는 생존을 위한 거라며 지도보는 법을 혹독히 훈련시켰었다. 무작정 직진하지 말것. 큰 건물을 찾아 그걸 기준점으로 방향을 잡을 것. 여전히 발레리나처럼 같은 자리에서 3바퀴쯤 빙글빙글 돌아야 방향이 잡혔지만 그래도 이젠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정돈 할 줄 알았다. 소유는 2바퀴 반쯤 제자리에서 돌돌 돌다가 확신을 가지고 저수지를 향해 걸어갔다.
저수지는 딱 생각만큼 컸다. 소유가 다니던 대학의 건물의 절반쯤은 퐁당 빠뜨릴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며 30분쯤 걸었을까. 산책 길에는 어느덧 보슬비가 내렸다. 우산을 펴고 속도를 늦추며 소유는 비 냄새를 맡았다.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저수지에서 흘러오는 미약한 물비린내. 옹기종기 피어있는 꽃들과 나무에게서 풍겨오는 잔잔한 꽃향기와 풀내음. 저수지를 둘러싼 산책로에서 벗어나 공원으로 접어들자 아직 한낮의 더위를 대비해 부채를 들고 나선 할머니들이 정자 밑에 모여 비를 피하고 있었다. 강아지를 안고 재빠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운동기구에서 손을 떼고 우산을 펼쳐든 사람들을 보며 소유도 문득 어딘가 실내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버스를 꽤 오래타서 속을 가라앉히고 싶기도 했고 이 넓은 공원을 홀로 산책하기 보단 함께 비를 피하고 싶어진 것이다. 마침 일월도서관이 공원 주변에 있다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소유는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도 책을 좋아하긴 했으나 사서가 된 이후 소유는 여행지에 가면 꼭 그 지역의 도서관이나 지역서점에 들렀다. 책도 책이지만 큐레이션은 어찌 해뒀는지, 어떤 책을 소개하고 또 밀어주는지, 조명은 어떻고 의자는 어떠한가 하나하나가 다 다른게 재미있었다. 이것이 책 밖으로도 관심을 넓힌 것이라 해야할지 남이 제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공간에서 누리는 만족감인지는 몰라도 제법 생산성 있는 버릇이었다. 일월도서관은 규모가 특별히 크다거나 대단히 아름답진 않았지만 뻔해서 안정감 있고 착실해서 보기 좋았다. 도서관에 들어가는 길에선 오전에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는지 "작가님을 실제로 보니 좋지 않았어?"채근하는 엄마와 "음. 음."하며 눈을 피하는 어린이가 있었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로비에는 점심메뉴를 고민하는 중학생들이 문제집을 챙겨 넣으며 우산을 펴고 있었다. 아. 향수가 밀려오는걸. 소유는 추억에 잠겨 도서관을 한바퀴 둘러본 뒤 곧장 자료실에 들어가 샅샅히 서가를 뒤졌다.
소유의 엄마와 언니는 종종 소유가 사거나 빌려온 책을 따라 읽으며 질문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책을 잘 찾아오냐고. 물론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했으니 책이나 도서관에 대한 이해도도 달랐지만 소유가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중요한건 믿음이었다. 이중 어딘가엔 아주 재밌는 책이 있으리라는, 포기 하지 않고 찾다보면 꼭 1권쯤은 날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믿음. 소유는 오늘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책장 앞에 섰다. 비를 피할 시간동안 잠깐 읽을만한 적당히 짧고 흥미로운 책은 어디에 있을까. 오래 지나지 않아 신간도서 코너에서 찾아낸 책은 '탈북의 역사'였다. 창가 구석진 소파에 앉아 소유는 흥미롭게 책을 읽었다.
코로나 기간에는 탈북이 더 힘들었구나. 북한은 여성인권이 더 엉망이구나. 탈북의 경험은 일률적이지 않구나. 연신 놀라워하며 책장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애초에 얇아서 고른 책이니 읽는데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햇살이 쭈뼛대며 돌아올 때쯤 소유도 독서를 마치고 기지개를 폈다. 슬슬 배가 고팠다.
소유는 짧은 여행을 기념하며 뭘하면 좋을까 잠시 궁리했다. 식사를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갈까 싶었지만 주변이 주택가라 그런지 프렌차이즈 말곤 딱히 보이는 음식점이 없어서 고민이었다. 역시 관광도 문화체험도 마쳤으니 기념품을 사가는게 좋지 않을까? 소유는 장고 끝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마트로 향했다. 이마트야말로 로컬상점이니까 아무래도 기념품을 사기엔 딱이었다.
서수원 터미널과 이마트가 붙어 있었구나. 소유는 신기해하며 마트를 둘러봤다. 오징어를 버터에 구워 팔길래 잠시 시식해보고 꽃게가 제철이라기에 흙 뭍은 꽃게도 들여다봤다. 돌아가는 길이 멀진 않지만 이것저것 번잡스럽게 들고 가긴 싫었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일까. 고민끝에 내린 최선의 결론은 마라탕 소스였다. 들고 가기 편하고, 적당히 구하기 힘들고, 이국적이니까. 음 완벽해. 소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모든 여행길이 그렇듯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갈 때와는 다르게 직행 버스에 지하철을 탔으니 시간은 반절도 안걸렸는데. 설렘이 사라진 귀갓길에 가방과 다리는 유난히 무겁고 시간은 유달리 더뎠다. 연신 하품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해 겨우 집에 도착하자 소유는 얼른 손발을 씻고 미리 배달해 둔 점심을 먹었다. 샐러드 속 치킨을 아작아작 씹어먹자 몸에 활력이 도는 느낌이었다. 역시 집이 최고야. 여행 다녀올때마다 느낀다니까. 겨우 반나절만에 진심으로 드는 감상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설프고 웃겼다. 그리고 소유는 다시 한 번 솜이 언니와 수 많은 언니들을 떠올렸다.
처음 하루키를 읽게 된건 새내기 때 기숙사를 같이 썼던 언니 때문이었다. 가족이 다 같이 하루키를 읽는다는게 어쩐지 멋지게 들려서 따라 읽었던게 소유의 처음이었다. 또 밥을 먹을 때 다른 사람들 물잔을 잘 살펴보게 된건 언니의 친구들 때문이었다. 같이 밥을 먹을 때 잔이 빌 때쯤 물을 채워주면 센스있다고 감탄하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새로운 습관을 들였더랬다. 무엇보다 소유가 가장 좋아하던 언니. 친언니는 그 모든 정점에 있던 인물로 소유에게 목이 꺾여있는 사람의 감각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내려다보는 사람, 쫓기는 사람보다 올려다 보는 사람과 쫓는 사람의 열망과 기억이 더 강렬하다는 것을.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과 그럼에도 바라보게 되는 바람을. 언니가 준거라면 두배는 더 멋져보이던 옷들과 언니들이 추천해주면 서너배는 좋아 보이던 물건들을. 소유는 이제 그때 그 언니들 보다 더 나이 많은 어른이 되었지만 그때 그 언니들 만큼 멋지고 인상깊게 살고 있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순간마저 언니들을 따라하고,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해하면서도 제멋대로 언니들의 말과 행동을 해석하고 만족해버리는 제자신을 보면 더더욱. 전화 한통이나 인스타 DM 한번으로 충분히 다시 연이 닿을 수 있는 언니들이지만 막상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걸 보면 역시 머릿속에 남아있는 동경과 열망 자체를 그리워 하는지도. 목이 꺾인 자세가 삶과 몸에 익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소유는 여행 짐을 모두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 낮잠을 청했다. 그리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홀로 나선 오늘의 여행을 정말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지. 마음이 오롯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것을 혼자의 것이라고는 할 수 있는지. 제자신이 그럴듯한 언니가 됐는지나 정말 혼자가 될 수 있을지를 모두. 어릴 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로, 여전히 확신없이 어지러운 생각 사이로 잠은 또 슬그머니 잘도 밀려왔다. 당장의 나들이가 좋았던가도 확신하지 못하는 처지일지언정 착실히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