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도전기]도서관 산책의 요령
문정과가 알려주는 도서관의 맛
죽을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도서관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때는 15살 무렵으로, 도서관 구석구석을 구경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책들로 가득 둘러싸인 곳에서 죽으면 좋지 않을까. 그때쯤 내 꿈은 도서관 관장이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일터에서 죽는다니 조금 많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참 부러운 순수함이다. 그때는 그렇게 별 이유 없이 책을 많이도 사랑했다.
무럭무럭 자라 결국 사서자격증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도서관을 좋아한다. 새 책을 들이고 그것이 호응을 얻는 과정, 손길이 잘 가지 않는 책들을 독자에게 소개해 주는 것, 재치 있는 행사와 그로 인해 불어나는 이용자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운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과 보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한국엔 그다지 많지 않다. 도서관의 고요, 그 안의 활기, 책들이 주는 가만한 용기와 지혜가 모두 큰 위로고 기쁨이다.
그래도 일터는 일터라 내 도서관보다는 남의 도서관에 가는 걸 더 좋아한다. 내가 관리하는 도서관은 서가를 둘러보다가도 '이크. 이 전집은 다 버려야 되나. 그럼 장서 균형이 안 맞는데 이거 어쩌냐'싶고 창밖으로 나무를 바라보다가도 '저 창문에는 절대 손이 닿지 않던데 도대체 언제 닦지..' 하며 한숨이 나온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래도 남이 궂은일을 대신해 주는 게 최고구나. 새롭지도 않은 깨달음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찾는 곳은 언제나 주변의 공공도서관들이다.
준비가 되었다면 도서관을 천천히 둘러볼까. 건물 주변에 진입하자마자 간단한 조경이 보일 것이다. 나무와 벤치정도로 작게 조성되어 있는 곳이 더 많긴 하지만 요즘은 공원과 도서관을 인접하게 위치시켜 문화생활공간, 여가공간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도 많다. 수원에는 망포 글빛도서관이 대표적인데, 3층이나 4층에 아예 전망대를 마련해 놓고 동네나 공원이 내려다 보이게 한다거나 1층에 카페를 만들어 놓는 등 도서관이 가지고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한층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도서관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보통 어린이 자료실이다.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은 2층이상의 단독건물로 지어져 있는데 1층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자료실과 행정업무 공간, 2층에는 성인을 위한 자료실이나 열람실이 있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다. 혹시 마음이 고달프거나 '요즘 그림책은 성인을 위한 것도 많다던데'싶어 궁금한 어른들, 부담 없이 책의 즐거움을 다시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필히 추천한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제법 진지한 추천도서 큐레이션도 인상적이고, 가끔 있는 독후 이벤트들 또한 새로운 재미를 선사해 줄 것이다. 일례로 제주 꿈바당 어린이 도서관에서는 제주 신화와 민속문화에 대한 큐레이션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복도를 장식한 고래 조형물들과 어우러져 근사한 분위기를 풍겼던 것이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각박한 세상에 사는 어른들이 오후 6시까지 운영하는 어린이 자료실에 방문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만약 그보단 담백하고 실용적인 책, 뭔가 도움이 되는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곧바로 2층으로 향하자.
2층에는 찬란히 빛나는 책들이 이용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정말이지, 도서관은 책에 정말로 최선을 다한다. 문화행사, 운영, 전시, 시설 관리, 프로그램 운영 등 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자원을 발굴하는 데에도 진심이지만 무엇보다 그 근간에는 '수서'가 있다. '수서'란 도서관에 자료를 구입하는 일을 의미하는데, 도서관에 들어오는 책들은 대부분 수서회의를 거친다. 책 내용보다는 표지를 많이 보는 게 사서들이라지만 그들의 전문성이나 노력은 진실로 진실되다.
어쩌다 보니 업무상 지역 도서관의 외부위원으로 등록되어 있어 가끔 수서회의에 방문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장서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서선생님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출간된 지 15년 이상 된 양서를 구입했을 때 장기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지, 이용자의 요구는 '열기구'에 관한 궁금증이었는데 '탈것'이라는 큰 주제보다는 '열기구'라는 좁은 범위를 다루고 있는 책을 사는 게 더 적합하지 않을지, 그렇다면 담당자가 혹시 관련 도서를 좀 더 찾아볼 수 있을지, 과학책의 경우 이미 충분한 장서를 갖추고 있는 동식물 분야보다는 새로운 주제의 책들을 더 많이 구입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지 등등.. 이용자 희망도서를 제외하고(이건 대부분 그냥 사준다) 새롭게 도서관에 들어오게 될 책 한 권 한 권이 모두 진지한 고민 대상이다.
이렇게 회의와 고민을 거쳐 들어온 책들이니 다소 지루하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외양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언정 그 내용이나 지향하고 있는 방향이 형편없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내가 뭘 찾는지 나도 모르는데 어쩌란 말인가 답답하다면 다음과 같은 꿀팁을 따라보자.
1. 신간도서를 살펴보자. 대부분의 도서관에는 신간도서코너가 온, 오프라인 공간에 마련되어 있다. 다양한 장서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만큼 신간도서들의 스펙트럼도 무척 다양할 것이다. 이번주 우리 동네 도서관의 신간 도서코너에는 추종과 희망을 착취하는 사회와 그 언어를 분석하는 책, 동네를 산책하며 만날 수 있는 식물들과 그들의 이름과 특징을 소개하는 책, 5권이 넘는 시집, 자존감 관련 육아서, 불교문화 연구 서적 등이 들어와 있었다.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지만 관심이 생겨 첫 번째 책을 집어왔는데 아주 재밌게 읽고 있음은 물론이다.(책의 제목은 '컬티시:광신의 언어학'이다.)
2. 재미있게 읽었던 책의 제목을 검색하자. 분류번호를 보고 무사히 그 책이 있는 자리로 찾아갔다면 이제 그 책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책들을 둘러보면 된다.
도서관의 책들은 주제로 분류되어 있어, 이전에 당신이 재미있게 읽었던 책의 주변에는 비슷한 책들이 잔뜩 꽂혀있다. 미술사에 관심을 갖게 해 줬던 '방구석 미술관'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그 옆에는 같은 작가가 낸 후속작인 '삶은 예술로 빛난다'가 비치되어 있을 것이다. 흥미와 교양본위에서 좀 더 깊어져 삶과 예술의 접합부를 들여다보고자 노력한 책이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보다는 다른 화가들과 미술사에 관심이 생겼다면 걱정하지 마시라. 책장 아래, 위, 옆으로 잔뜩 시대별, 화가별 예술 관련 책들이 꽂혀있을 것이다. '반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으며 작가의 생애를 파헤치거나 시대별로 정리된 미술사 책들을 훑어보며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해 나갈 수 있다.
3. 제일 쉽고도 어려운 방법으로, 담당 사서에게 추천을 부탁한다. 대부분의 도서관에서는 이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대학도서관이나 전문도서관처럼 전공지식, 논문 작성, 참고 문헌에 대한 조언은 얻을 수 없을지언정 간단한 조언정도는 구할 수 있다. 물론 해당 도서관의 적극성이나 분위기에 따라 답변은 천차만별일 수 있으나, 정보서비스는 이용자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도서관 서비스 중 하나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면? 걱정하지 말자. 우리에겐 온라인 서비스가 있다! '사서에게 물어보세요'코너를 통해 '한국 역사소설 중 내용이 재밌고 주인공이 여성인 책도 있을까요?' 같은 질문을 남기면 최소한 두세 권 정도는 추천 답변이 달릴 것이다. 질문이 구체적일수록 실용도가 높아질 것임은 물론이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대화형 AI에게 답변을 받는 것 같지만, 전문가의 답변이니 질적으로 훨씬 나을 것임을 장담한다. 단점이 있다면 해당 도서관의 사서들이 당신을 기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고, 도서관별로 서비스 실시 유무는 확인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읽을 책을 골랐다면 유유자적하게 책을 읽을 자리를 찾아보자. 딱히 팁이라기엔 소소하지만 소리가 요란스럽지 않고 주변에 냄새나는 사람이 없는 자리면 사실 어디라도 괜찮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이 재미있는 순간에는 자리를 가리지 말 것. 경험상 책은 불편하게 읽을수록 재밌는데, 책을 꺼내다 궁금해서 펼쳐든다는 것이 그 자리에 내내 서서 100여 쪽을 주파해 나갔다거나 하는 식이다. 라디에이터에 기대서, 바닥에 주저앉아 엉덩이가 저려 이리저리 들썩거리면서, 책장 사이에 낀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서서 책을 읽자. 달콤한 몰입의 순간은 길지 않고 당신은 그 순간을 못 잊어 또 도서관에 방문하게 될 것이다.
도서관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문화 공간이다. 이용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되 가장 평등하게 지식과 여가와 몸을 뉘일 공간을 마련해 주는 곳이다. 사실 이외에도 아직 읽고 싶은 책이 없다면 지정된 서점에서 무료로 책을 빌려 온다음 다시 도서관에 반납하는 '바로대출 서비스'나, 아무리 멀리 있는 책이라도 도시 내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가장 가까운 도서관으로 원하는 책을 배달해 주는 '상호대차' 서비스, 도서관별로 상이한 독서모임이나 작가와의 만남 등 구석구석 누릴만한 콘텐츠가 아주 많다. 문헌정보학도로서 이 모든 걸 나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깝다 싶다가도, 아니 이게 알려질수록 사서 선생님들이 바빠질 텐데 싶어 쪼금은 미안하고 그렇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책 관련 분야 종사자들은 한 명, 한 권이라도 독자를 키워내고 싶어 안달이 난 경우가 많으니.. 다들 이 정도 수고로움쯤이야 너끈히 이겨내리라 믿는다.
그러니 속는 셈 치고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요령을 피워보시라. 눕고 앉고 걸어 다니며 도서관의 조용한 공기를 만끽하고 손으로 책장을 쓸어보거나 발을 쓱 당겨주는 듯 가만한 바닥의 지면감각을 느껴보시라. 도서관은 실로 여러분의 것이라 어떻게 마주 하느냐에 따라 수 없이 많은 표정을 보여줄 것이다. 평일 낮에 방문한 도서관엔 중년, 노년의 이용객이 가득하고 주말 점심의 도서관엔 나들이온 어린이들이 한가득이다.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운치와 더운 날 열람실의 쾌적함이 다르고, 행사날의 활기와 시험기간 학생들의 열기는 얼마나 다른지가 날이 갈수록 낱낱이 보일 테다.
또 모를 일이다. 그러다 종내엔 도서관에서 죽고 싶어 질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