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benothing
Oct 18. 2023
나는 기억한다. 아빠는 짙은 새벽마다 산엘 데리고 갔다. 케이크에 장식된 생크림처럼 흰 눈이 쌓인 날이었다. 나는 아마 열두 살 즈음이었고 새벽에 일어나는 게 고역이었다. 두꺼운 패딩 슈즈 발바닥에는 이빨처럼 생긴 날카로운 쇳덩이가 덧대어 있었다. 그 덕에 미끄럽지는 않았지만 코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추웠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에 올라 밝은 회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빠는'죽을 때까지 운동해야 해. 절대 잊지 마.' 하며 비장하게 이야기했다. 코가 시큰한 아침 냄새가 어떤지, 내려다보는 풍경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새벽잠을 물리치고 흘린 땀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등의 감상 젖은 말은 없었다. 단지 살이 잘 붙는 아빠 피를 물려받은 내게 해줄 수 있는 충고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나는 바짓단을 둘둘 말아 올려 종아리를 훤히 내놓고 눈물을 참고 있었다. 아빠는 기다란 자를 가져와 종아리를 세게 내리 쳤다.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맞고, 울고, 잠이 들면 불 꺼진 방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끈거리는 종아리 위해 차갑고 미끌거리는 것이 닿았다. 거친 손가락이 상처를 문질렀다. 아빠는 밤 중 몰래 약을 발라주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버텼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사라졌다. 이메일을 수십 통 보냈다. 걱정을 듬뿍 담아, 간절함을 듬뿍 담아, 슬픔을 듬뿍 담아, 증오를 듬뿍 담아, 저주를 듬뿍 담아 보냈다. 동네에는 피아노 치는 언니와 같이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둘은 어른들 모임 안에서 꽤나 친근했던 모양이었다. 그 언니가 이사 간 시기와 하필 맞물린 모양이었다.
아빠는 예전에 자주 볼뽀뽀를 해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빠는 내게 종아리에 닿는 회초리 같은 존재였다. 그럴 때마다 경직된 얼굴에 억지로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도망쳤다. 아빠의 불가해한 사랑이 무섭고 끔찍했다. 아빠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혼란스러웠다.
그가 떠나고 난 후 먹구름만이 가득했던 집을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실체화된 먹구름은 어른들 마음속에서 꾸깃꾸깃 접혀있다 불쑥 토해내진 건 아닌지, 외로움의 원망은 누구 몫인지 생각한다.
이제는 아빠의 먹구름이 걷혔을지 내 안에 자라나는 먹구름은 어찌해야 할지 생각한다. 모두의 먹구름이 맘 속에서 비가 되어 시원하게 쏟아 내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