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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othing May 24. 2023

죽음 이후 내가 꽃이 된다면

화장(花葬)의 도시

한 도시에는 기이한 장례 정책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탄생의 축복과 함께 '미래의 씨앗'이라는 것을 몸 속에 주입한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별다른 부작용 없이 씨앗과 함께 일생을 살아간다. 이후 사망하게 되어 생체 반응이 종료될 때쯤  '미래의 씨앗'이 몸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윽고 시신의 부패가 끝이 나면 유골에서 꽃이 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눈구멍과 입, 척추와 갈비뼈 사이로 뻗어 오른 줄기 끝에 꽃송이들이, 비로소 망자의 죽음을 완전하게 애도하듯이 맺힌다. (15p)



육신을 태우는 화장(火葬)이 아닌, 육신을 화분 삼아 꽃을 피우는 화장(花葬)을 하는 것이다.

특이한 점은 살아온 일생의 흐름에 따라 꽃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시체에서 피어난 꽃이 그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믿는다. (17p)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나'와 '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므로 영원한 무(無)의 상태라고 여겼다. 이야기 속의 '미래의 씨앗'이 사망 이후 꽃을 피운다면, 그것도 내 삶을 반영한 형태의 꽃이 자란다면, '나'가 無의 상태가 되는 것이 맞을까? 자연으로써의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떤 꽃을 피우게 될까.


딱히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안긴 적도(내가 아는 한) 없고, 법과 규율을 잘 지키며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다만 무기력하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내 시체꽃은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며 길가 어디에나 있는, 흔하디 흔한 개망초나 애기똥풀 정도일 것이다. 매일 차이고 밟히고 짓이겨져 형체를 잃더라도, 누군가는 무성하게 자라나는 무쓸모의 풀을 뽑아내려 애쓰고, 누군가는 지나가며 눈을 흘기는 잡초이더라도 꽃은 꽃이니까.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많다고? 아니면 이 도시에 한해서? 사람들이 그야말로 지나간 세대의 다양한 시체꽃에 자극받고 경각심을 지니게 되어, 두려움이라는 타율적인 요인 때문에라도 질서를 지키고 정도를 걸으며 살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20p)


도시의 묘지는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피로감을 느꼈다. 죽어서까지 품위 관리를 해야 한단 말인가? 죽음 뒤 타인의 시선을 위해 염결 하게 사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의 꽃들만 꽃이라 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3년 뒤 진실이 밝혀지게 되는데 망자의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서 사악한 형태의 꽃들이 창궐하여, 묘지를 관리하는 공무원들이 시체꽃을 모두 뽑아내고 아름다운 꽃들을 사다가 심었다는 것이다.


남아 있는 것들은 천 년쯤 거뜬히 그 자리에서 버틸 것만 같은 괴화怪花들 뿐이었다. (25p)


인간의 죄와 무결의 기준은 사회에서 정립한 도덕이나 윤리, 법률이 아니었다. 철저히 자연의 기준에 따른 판결이었다. 결코 무결한 사람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 '태어남'을 통해 죄짓게 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지모른다. 그저 괴화로 태어난 이상, 스스로를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존재라 느낄지언정 사실 남들과 다를 바 없다고, 악함과 선함을 모두 품고 살아가면 된다고, 은 그저 존재함으로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흔하디 흔한 잡초라도, 화려하고 향긋한 장미라도, 시체 썩은내가 진동하는 송장꽃이라도 우리는 모두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그러니 지금의 삶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병모, 「화장花葬의 도시」, 『로렘 입숨의 책』, 안온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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