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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만혜서 Nov 15. 2023

위대한 음식

혹은 향신료

나는 음식사진은 찍지 않는다. 의식주 중에서 가장 잦은 빈도로 찾아오는 게 식(食)이지만 나에게는 에너지 보충의 시간일 뿐이다. 약속시간이 다가오면 어느 식당에서 만날지 고민해야 한다. 그 시간은 곤욕스럽다. 센스 있는 친구가 카카오톡에 맛집리스트를 올려주면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싶을 정도다.


먹부심은 없어도 나름의 철학은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혼자 먹는 라면은 맛이 없다.'나 '라면은 1개만 끓여야 맛있다(사람이 열명이라도)'나 '밥은 먹고 일해야 일이 덜 미워진다.'같은 거다. 나의 철학은 맛보다는 소울이 우선이다. 남자 소울푸드 3 대장은 제육, 돈가스, 국밥이고 여자 소울푸드는 떡볶이, 마라탕, 닭발이라고 한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마라탕이 당기는걸 보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늦봄이 되면 항상 찾는 음식이 있다. 키햐아에서 파는 냉소바이다. 시즌 오픈을 하자마자 달려가지만 3년째 먹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더워질 때마다 냉소바를 찾는 건 그 속에 숨은 초록 알갱이들 때문이다. 바로 와사비다. 야채가 가득한 냉소바를 먹지 못하는 날이면 초밥이라도 시켜야 한다. 코끝이 찡해지는 와사비가 나에겐 최고의 소울푸드이다.


와사비는 일본 북부가 주원산지이고 재배환경이 까다로워 1kg에 40만원일 정도로 비싸다. 그 이유로 우리가 와사비로 알고 먹은 제품들은 홀스래디쉬라는 서양 겨자무에 색소를 첨가한 것들이다. 내가 여태 먹은 와사비 중 진짜는 없을 수도 있다. 비록 가짜 와사비이더라도 나는 톡 쏘는 그 맛을 사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힘들 때 먹은 와사비가 내가 가진 고통을 안고 코끝으로 방출되는 기분을 느껴서이다. 찡한 고통으로 얼굴이 얼그러지면 그 표정은 화날 때와 같다. 나는 와사비를 먹으면서 가짜 화를 내는 착각에 빠져 진짜 화를 잊는다.


난 초밥을 먹을 때마다 "와사비를 먹으면 기분이 나아져!"라고 홍보를 한다. 잘못 씹은 와사비에 미간을 부여잡으면 터지는 상대방의 리액션도 재미있다. 좋아하는 후배에게 내 기분이 저기압이면 초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된다고 꿀팁도 전해주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방법을 하나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어쩌면 세상일이 와사비 한 알갱이로 해결될지도 모른다. 위대한 와사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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