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는 결국 제자리로 가고싶다는 마음이다.
좁은 골목길에서 차가 차를 마주쳤다. 무비의 주황색 미니쿠퍼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상대차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차 아저씨가 경적을 울리자 무비는 차 창문을 모두 내리고 소리를 빽 내질렀다. 무서운 아이다. 나보다 한참 작고 가녀린 그녀의 이름은 영화이다. 영화의 화는 火 틀림없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런 영화와 내가 매일 달고 사는 말은 "우린 화가 많아"이다.
나와 영화는 나이도 MBTI도 취향도 같다. 그러니 성격도 비슷하다. 나도 내면속에서 걸핏하면 화를 마주친다. 글쓰기 마감을 앞두고 아이패드 충전 속도가 역행하면 극소노, 로봇청소기에 선이 꼬여 멈춰있으면 소노, 회사에서 보고서 결재가 퇴근까지 안되면 중노, 상대가 꽁하게 있으면 대노, 시골집에서 사건사고 소식이 들리면 극대노. 나의 극소노-중노는 휘발되지만 대노와 극대노는 분출될 때가 종종 있다.
시골집에서 전화가 왔다. 나는 한숨을 숨처럼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친척과 경로당에서 난투극을 벌였다는 소식이었다. 40살 때부터 경로당 막내였던 엄마는 친척의 참견을 참지 못하고 머리채를 쥐었다고 했다. 2살 아이처럼 화내는 엄마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때리는 건 나쁜 거야, 아지매랑 사이좋게 안 지내면 나 엄마 보러 안 갈 거야"라고 발끈의 방아쇠를 당겼다. 엄마의 화에 기름을 붓는 말을 하자 엄마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또 한숨을 비명처럼 내쉬었다. 나의 한숨은 분명 내쉬었지만 마음속으로 들어와 구멍을 내고 있었다. 스펀지같이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엄마의 울분이 파고들었다. 나는 평화로운 시골을 바랐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시간만이 성공했다.
나를 괴롭게 하는 화는 엄마가 아닌 남편과의 불화이다. 일주일의 동굴은 상상도 하기 싫다. 사전투표날, 나는 고양이 세수를 하고 모자를 쓰고 나갈 채비를 했다. 남편은 나가다 말고 갑자기 집안을 치우고 있었다. 책장 앞에 널브러진 박스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박스 좀 치워달라기에 나중에 하겠다 답했다. 내심 속으로 '자기가(지가)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전투표소에 가는 길 내내 남편은 꽁해 있었다. 침묵이 점령한 시간 동안 나는 나와의 대화에 빠졌다. '저게 저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야! 네 기분에 안 맞추고 싶다고' 속으로만 말하니 뜨거운 화가 목에 달라붙는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호흡을 방해한다. 나는 힘겹게 그 말들은 삼키고 살랑살랑 여우인 척 연기했다. "자기 기분 안 좋아? 내가 다 치워 놓을게~> <"
살랑한 모습과 다르게 나는 집에서 분노의 빗질을 했다. 문제의 박스도 치우고 남편일이였던 분리수거를 하고 식탁은 말끔히 정리했다. 남편 모자는 바닥에 내던지는 소심한 복수도 했다(내가 던지고 내가 다시 주워서 제자리에 놓았다). 청소를 하니 집안이 반짝반짝해졌다. 분노의 청소는 순기능이 있다. 분노 버튼을 누르기 직전 '화 내봤자 내가 더 아프다'라고 생각을 고쳐먹은 내가 어여뻤다.화를 내지 않으니 화가 저절로 풀렸다. 가까운 사람에게 화가 나는 이유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다. 나의 안전한 상태를 지키려면 가끔 연기를 해도 괜찮다. 분노의 가장 좋은 치료약은 연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