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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len Jan 25. 2022

등 떠밀려 세계 속으로 - 우루과이 편(下)

지구 반대편, 또 하나의 '따뜻한 동방 공화국'

 카디건, 반팔 티셔츠, 헐렁한 린넨 바지와 가죽 샌들 차림을 한 채, 빈 손으로 늦겨울 남미에 던져졌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차림으로 관광지가 아니라 협상장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수하물 없이 여름옷 차림으로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다는 건 그야말로 조난이었다. 그래도 사흘 후에 탈출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상황을 정리해 보니 잘 버티기만 하면 되겠다는 일말의 안도감이 들었다. 공항에서 호텔, 호텔에서 협상장까지는 전세차량이 데려다주니까 길에서 얼어 죽을 염려는 없고, 다만 협상장에 입고 갈 옷이 문제였다.

  다행히 호텔에는 컨시어지가 있었다. 양복을 빌릴 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보니 약도를 그려 주며, 가게가 저녁 일곱 시 반에 닫으니 일곱 시쯤 예약을 해주겠단다. 그 말을 듣자 안도감이 한 번에 밀려왔다. 추위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이고 모두가 차려입은 협상장에 이목이 집중되는 대참사를 피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몸이 추운 건 그래도 버틸 수 있겠지만, 싸늘한 시선이 일제히 쏟아지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영혼을 얼어붙게 했다. 아무튼 위기 탈출을 자축하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낯선 나라에서 보내는 평일 오후 시간은 특별했다. 여행을 다닐 때는 한시라도 빨리 관광지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후의 여유는 사치였다. 출장을 다닐 때는 협상 시작 시간에 딱 맞춰 전날 저녁이나 당일 새벽에 도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우루과이에는 비행편이 이틀 혹은 사흘에 하나씩 들어오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전날 오후를 특별히 허락받은 거다. 식민지 시대 대리석 건축물과 키 큰 야자나무가 함께 햇볕을 받고 있는 독립 광장(Plaza Independencia)은 여느 도시의 광장처럼 눈길을 머무르게 하는 랜드마크였지만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분주한 랜드마크가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의 삶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기타 케이스를 열어두고 길거리 공연을 하는 악사도, 캐리커처를 그려 주는 화가도, 싸구려 기념품을 파는 상인도 없었다. 카메라를 꺼내 든 사람은 나뿐이었다. 수많은 현지인들은 벤치에 앉은 채, 혹은 산책을 즐기며 특별할 것 없는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평범한 친숙함에 감화되어, 어느새 나 역시 사진 찍는 것도 잊어버린 채 통유리창이 환하게 열린 카페에 이끌리듯 들어갔다.

  볕이 잘 드는 카페는 바깥의 광장과 마찬가지로 더없이 평온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왔다는 사실에 아직 신기해하는 한국인 혼자만 들떠 있었다. 애초에 이민자의 후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여서 그런지 이방인을 신기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그들의 우호적 무관심 속에 나는 편안함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이에 화답하듯 현지인들이 가장 간편하게 먹는 음식을 시켰다. 치비토라고 불리는 샌드위치는 햄버거만큼 간편하거나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만 이틀 만에 지상에서 먹는 첫 끼로는 더없이 훌륭했다.

  끼니를 해결하고 나서 햇볕을 받으니 이내 몸을 가눌 수 없는 피로에 짓눌렸다. 현지 시각으로 오후 세 시였지만 몸은 아직 새벽 세 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호텔 방에 돌아와, 딱 두 시간만 자고 밀린 일 좀 하다 양복을 빌리러 가야겠다는 다짐으로 3분 간격 알람을 세 개 맞춰 두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직후, 큰일이 났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의 짧은 찰나에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몸은 너무 개운하고 상쾌한데 주위 모든 것들이 전부 먹먹한 적막에 싸인 듯한 불안감, 마치 <운수 좋은 날>의 김 첨지처럼,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얼마나 늦잠을 잤는지 진실과 대면해야 하는 그 운명의 순간. 눈을 뜨자마자 영락없는 그 분위기에 휩싸였다. 여덟 시 하고도 삼 분. 양복 대여점이 문을 닫고도 훨씬 지났을 시간이었다. 결국 나는 양복 없이 다음 날 협상장에 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또다시 식은땀은 흐르고, 호텔 방은 거대한 진공 튜브로 변했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8시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동료와의 저녁 약속에 '그리' 늦지 않았다는 것. 아무리 스스로가 한심해도 밥은 먹여야 했기에, 한 벌밖에 없는 옷을 얼른 차려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은 한국과는 딴판이었다. 햇볕이 사라지면 다들 집에 가기로 약속이라도 한 건지, 편의점과 식당 몇 곳을 빼면 완전한 침묵이었다.

  인생을 하루라는 지극히 인위적인 단위로 나누어볼 때, 매일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시작부터 잘 풀리다가 마무리까지 좋은 날, 불운과 좌절이 겹쳐 잠들기 전까지 분을 삭일 수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행운과 불운이 병 주고 약 주듯 번갈아 찾아오는 새옹지마형 하루도 있다. 그날은 전형적인 새옹지마형 하루였다. 수많은 불운과 한심한 늦잠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인생 최고일지도 모를 양갈비를 맛보았고, 그 덕분에 하루 동안 일어난 모든 불행과 다음날에 대한 걱정을 꽤 많이 덜어냈다. 배부름과 약간의 알딸딸함이 적절히 결합되었을 때 머릿속에 피어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류의 여유, 아마 한국에서 떠날 때부터 내겐 그런 게 절실히 필요했던 모양이다.


9.12.


  협상 당일 아침이 밝았다. 호텔 조식이 나오는 식당에는 스페인에서 자주 보았던 반가운 오렌지 주스 자판기가 있었다. 양복으로 한껏 멋을 낸 협상단 사이에서 협상을 총괄하는 사무관을 찾아, 난감한 복장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런 간단한 문제도 일단 물어볼 수 있다는 게 1년차의 특권 아니던가. 그는 나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더니 꽤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음... 다른 건 어쩔 수 없는데, 신발만 사서 가죠."

  사실 서로 멀리 떨어진 국가끼리 협상을 할 때, 수하물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는 경우가 꽤 잦다고 한다. 그래서 청바지나 티셔츠 차림으로 협상장에 들어가도 적절히 양해를 구하면 업계 사람들끼리는 웃으며 넘어간다. 다만 발가락을 내보인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에, 그럴싸한 로퍼 하나 정도는 사 가는 게 최소한의 도리였던 거다. 생각보다 받아들일 만한 해결책에 안도하며, 어느 작은 신발 가게에 첫 손님으로 들어갔다. 디자인이나 색을 고려하지 않고 4만 원 정도 하는 로퍼를 사서 갈아 신은 후, 협상장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회의실에 들어서자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되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4개 국가에서 온 20여 명의 눈길에 귀가 화끈거림을 느끼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가벼운 웃음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서로를 소개할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스페인어로 발음하기 꽤 어려운 이름을 갖고 있기에, 세례명인 '프란치스코'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있던 20여 명 중 절반 정도는 '어떻게든 프란치스코'였다. 누군가는 이름이 프란치스코, 다른 누군가는 미들네임이 프란치스코, 또 누군가는 성이 프란치스코. 국적도 피부색도 나이도 각자 다른 사내들 사이에서 이름 하나로 화색이 돌았다.

  오전 세션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꽤나 진한 인상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브라질의 프란치스코가 다가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혹시 괜찮다면 이 재킷을 오늘 빌려가고 내일 돌려줄래?"

  그의 옆에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몇 쌍이나 더 있었다. 다음 날 바로 공항으로 떠나야 하기에 거절했지만, 생각도 못한 호의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문득 백석의 시 <고향>이 떠오른다. 남반구에서 혼자 추위에 떠는 한 이방인에게, 브라질의 프란치스코야말로 '여래 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운', 따스한 손길을 내민 이였다.


  점심식사 시간. 대표단 전원이 몬테비데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한식당으로 향했다. '명가'라는 이름의 식당. 도쿄, 로스앤젤레스, 파리, 어디에든 하나쯤 있을 법한 한식당이었다. 사실 여행을 다닐 때는 현지 음식을 못 먹는 게 아까워서라도 한식당만은 피하는 편이다. 외국에서 딱히 한식에 대한 갈망도 느껴본 적이 없고, 같이 간 일행이 못 버티겠다고 하면 그제야 한 번씩 먹으러 가는 정도였다.

  그나마 가 보았던 한식당의 기억도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다. 유난히 추웠던 1월 어느 날 파리에서였다. 식당 주인은 (아마도 유학생이었을) 점원들과 함께 우리 일행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서는, 들을 테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떠들었다.

"올해는 겨울이 추우니까, 짬뽕 같은 거나 한번 해 볼까? 한 20유로로 올려 받아도 한국 사람들은 잘 먹을 것 같은데?"

  사장 입장에서는 파리를 지나쳐가는 한국인이 수만 명은 되는데 손님 세 명쯤은 다시 안 온대도 그리 아쉽지 않을 테고, 무료급식소가 아니라 임대료 비싼 파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마당에 못 할 말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 추운 겨울날 늦은 저녁 시간에 최소한의 따스함을 기대하고 간 외국 한복판의 한식당에서, 한국어로 그런 말을 듣는 기분이란. 현지인들이 아시안이라고 무시하고 등쳐먹는 건 백 번 양보해 무지나 인종적 오만의 소산이라 해도, 피부색도 인종도 언어도 같은 이가 그렇게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니 미묘한 적개심마저 들었던 거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가 합쳐져서, 대표단이 다 같이 한식당으로 간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못내 떨떠름해졌다. 어차피 이틀 후면 실컷 먹을 한국음식인데, 유명하다는 소고기 바비큐나 먹으러 가지. 한국이었다면 소고기 바비큐 먹느니 뜨끈한 돼지국밥 특에 공깃밥 말아두고 편육까지 곁들여 먹는 게 백 번 낫다고 했겠지만, 지구 반대편까지 왔는데 아쉽지도 않은가. 그런 마음을 뒤로 하고 버스에서 내려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 구성은 참으로 훌륭했다. 불고기나 잡채 같은 외국 한식당의 맵지 않은 클리셰 사이에서, 달고 짠 음식이 무언가 물리기 시작한 시점에 한국인 입맛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오징어덮밥이 눈에 띄었다. 주문을 받으러 찾아온 점원은 한국과는 아무 연이 없어 보이는, 원주민-흑인 혼혈로 보이는 다부진 청년이었다. 순간 '외국인이 한식당에서 주문을 받을 땐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지 못한 문제에 직면했다.

"오징어덮밥... please?"

  소심하게 던진 한 마디에, 점원은 씩 웃으며 응수했다.

 "오징어듶밥 하나요~"

  그의 한국어는 단순히 발음을 잘 하는 차원을 넘어서, 항구 도시의 억센 악센트까지 완벽히 덧씌워져 있었다. 생각도 못한 정겨운 한 마디에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파리 한식당의 한국인 주인보다, 몬테비데오 한식당의 인디오 청년이 훨씬 더 친숙하고 살갑게 느껴졌다. 지금도 가끔 오징어나 낙지볶음 종류를 먹을 때면 그때 들었던 한 마디를 혼자 따라해보곤 한다. <명가>의 오징어덮밥은, 따뜻함을 갈구하는 영혼을 위해 맵싸하게 볶아낸 한 끼였다.


9.13.


  우루과이에서의 2박 3일이 흐르고 마침내 떠날 때가 되었다. 에어유로파 항공편은 사흘에 한 번씩 돌아오기에, 다행히 떠나기 직전에 캐리어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척을 입국장에서 기다리듯, 떨리는 마음으로 승무원을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승무원이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 길을 잃은 아이를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내듯, 엷은 미소와 함 캐리어 손잡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캐리어를 받자마자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었다. 비행 시간까지 합치면 만 나흘 만에 옷을 갈아입는 셈이었다. 새로운 옷을 걸쳤을 때의 그 바스락거리는 상쾌함이란. 아무튼 몬테비데오 한복판을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던 동양인 청년은, 드디어 따뜻한 외투를 걸친 모습으로 성불했다.

  정신이 없어 기념품을 하나도 사지 못한 게 생각났다. 그 전까지는 기념품은 그냥 모셔두고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실용적인 기념품을 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국기의 태양과 국가명이 수 놓인 목베개를 보는 순간 운명적인 이끌림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36시간의 이코노미 클래스 비행에서 목베개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못 보던 새 많이 수척해진 캐리어와, 운명처럼 만난 우루과이 목베개.

  그리하여 우루과이에서 늘어난 짐은 딱 두 개였다. 협상장에서 잠깐 신으려고 산 로퍼와, 앞으로도 등 떠밀려 세계로 떠날 때 유용하게 쓰려고 산 목베개.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참으로 지독하다. 오래 쓰려고 산 목베개는 인천공항에 내릴 때 어딘가에 떨어뜨려 36시간 만에 잃어버렸다. 반면에 잠깐 신다가 적당히 버리려고 산 로퍼는 우리 부모님 댁 테라스용 신발이 되어, 꽃들과 함께 햇볕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우루과이와는 정반대 방향을 보고 자라는 부모님 댁 테라스의 꽃들처럼, 나도 다시는 그 땅을 밟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곳에서 받은 환대와 따뜻한 눈길과 호의를 생각하면, 72시간의 무지막지한 비행도 다시 한 번 감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루과이의 정식 명칭은 '우루과이 동방 공화국'이다. 처음에는 동아시아의 대척점에 '동방'이 또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직접 겪어 보니 이만큼 따스한 동방의 나라는 또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우루과이 출장은 행운과 불행이 오묘하게 뒤섞여서, 돌이켜볼 때마다 이유모를 미소가 지어지는 한 편의 로드무비였다. '우루과이 출장'을 '인생'으로 바꿔도 꽤 그럴싸한 문장이 된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한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바로 2018년 9월의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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