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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롯 레터 Plot Letter Feb 20. 2022

무너지지 않는 왕, 무너지는 아버지. <리어왕>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봐

▲ <King Lear and Cordelia>. Edward Matthew Ward

모두 모두 불행하게 살았더래요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고대 영국의 브리튼을 다스리던 왕, 리어. 어느덧 80세가 되어 노쇠해졌음을 느낀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기 전 자신이 갖고 있던 영토를 세 딸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결심하죠. 오랜 고민 끝에 리어가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딸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애정하는 정도에 따라 왕국을 분배하는 것! 그는 세 딸 고네릴, 리건, 코델리아를 향해 아버지인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딸에게 가장 큰 몫의 땅을 주겠다며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표현해보라 요구해요. 


첫째 고네릴과 둘째 리건은 광활한 지분의 영토를 얻기 위해 온갖 화려한 말로 아버지를 만족시키려 노력하지만, 왜인지 막내 코델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리어를 당혹시키죠. 이에 리어 왕은 재산을 상속받고 싶다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말하는데요,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코델리아는 사탕발린 말 대신 진심만을 전달하고 싶어했어요. 그렇게 끝까지 완고했던 그녀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죠. 실망한 리어왕은 결국 고네릴과 리건에게만 땅을 나눠주고 만다고.


▲ 연극 <리어 왕>, 출처: The Guardian

아버지의 실망을 산 코델리아는 단 한 푼의 유산도 물려받지 못한 채 프랑스로 시집을 가게 되고, 모든 재산을 나머지 두 딸에게 넘겨준 리어는 고네릴과 리건의 집을 번갈아 방문하며 남은 생애를 여유롭게 보내려 하죠.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이미 재산을 물려받은 두 딸은 아버지를 공경하기는커녕 늙고 가진 것 없다는 이유로 쫓아내고 만다는데. 머릿속이 욕심으로 가득한 이들은 이후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활활 타오르다 첫째 고네릴이 동생 리건을 독살한 뒤 끝내 감옥에서 자결하고 말아요. 그렇지만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이들뿐만이 아닌데요,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셋째 딸 코델리아마저 죽임을 당하고,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리어 또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고.


아버지 리어 왕은 결국 세 딸과 자신의 목숨 모두를 잃고 말았군요! 결국엔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했다니 너무 슬프네요...

▲ 윌리엄 셰익스피어, 출처: biography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게 아니라고? 


여기까지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알려진 희곡 <리어 왕>의 줄거리인데요, 세기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명작 <한 여름밤의 꿈>이 궁금하다면 여기를 클릭!) 그런데 놀랍게도 희곡 <리어 왕>은 셰익스피어가 이야기의 모든 내용을 창작한 것은 아니라고!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신화전설야사*에서 소재를 가져왔는데요, 이는 <리어 왕>도 마찬가지였죠. 실제로 영국의 고대 왕국 브리튼의 역사 기록에서 리어와 그 딸들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고, 이외에도 <리어 왕>의 원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레어 왕과 세 딸의 연대기>가 있다는데.


*야사: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글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 왕>에서 왕에게 세 딸이 있다는 점과 아버지가 효심 경쟁을 시킨다는 점은 원작과 같지만, 원작에서 왕이 딸들의 효심을 말로 표현하도록 하는 ‘효심 경쟁’의 목적은 유산 상속이 아닌 남편감을 선택하는 것에 달려있었어요. 또,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는 모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반면, 원작의 결말은 리어가 왕국을 되찾는다는 내용의 해피 엔딩이라고!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보다 비극적으로 각색하기 위해 셰익스피어는 독창적인 인물들이나 상황을 창조해냈어요. 딸들을 모두 잃은 슬픔으로 리어가 실성하는 때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을 새롭게 삽입했고, 리어의 실상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인물인 어릿광대(�: 수수께끼와 노래를 통해서 주인인 리어에게 그의 잘못된 판단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경고하는 인물이에령!) 등을 추가한 것이 그 예시이죠. 특히 코델리아는 살해당하고 이에 절망해 리어 왕이 목숨을 끊는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함으로써 보다 조직적이고 독창적인 비극을 창조한 거라고.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들이 오늘날까지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네요!

▲ 코델리아를 잃고 절규하는 리어 왕, 출처: intellectual takeout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어 


앞서 소개한 <리어 왕>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완전히 새롭게 창작한 것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대를 막론하고 뛰어난 극작가이자 시인으로 위상을 굳힐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작품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제시했기 때문! 셰익스피어는 주인공 리어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때로는 한 국가의 군주로서 바라보며 다양한 관점에서 그의 행동을 비판했어요. 세 딸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무한한 공경을 표하리라는 독단적인 믿음 아래 시작된 효심 경쟁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아버지로서 리어가 겪는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죠. 효심이라는 정서적인 개념을 물질적인 보상의 개념으로 보았고, 효도하는 마음을 이야기로 전하는 일이 내면의 효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도 리어가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또한 소중한 막내 딸을 차갑게 내쫓아 버리고 난 뒤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됐을 때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는 부분에서는,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 아닌 침묵의 사랑도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줘요. 이와 더불어 리어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와 권력은 결국 의미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하죠. 겉으로 보여지는 아버지로서의 모습과 왕으로서의 권위만을 소중히 여겨왔던 리어가 무너지는 모습을 표현하며, 셰익스피어는 표면에 드러나는 것만 중요시하고 그 내면은 등한시하는 삶의 태도를 비판하는 듯해요.


영원할 것만 같았던 것들을 한 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셰익스피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 연극 <리어 왕> 포스터

이순재가 연기하는 리어 왕 


희곡 <리어 왕>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인 만큼 세계 곳곳의 극장에서 연극으로 상연되며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는데요, 다가오는 10월 말 국내에서도 연극 <리어 왕>이 무대에서 펼쳐진다고 해요!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 연극이 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배우 이순재씨가 88세의 나이로 역대 최고령 리어 왕 연기에 도전하기 때문이라는데. 이 외에도 소유진이연희 등 한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유명 배우들도 이 연극에 참여하죠.


이번 연극의 또 다른 묘미는 바로 원작 희곡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했다는 점인데요, 그동안 수많은 형태의 연극 <리어 왕>이 탄생했지만 그 중 원전을 고스란히 담은 버전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희곡의 내용뿐 아니라 의상이나 분장까지도 그대로 살렸고, 산문과 운문의 구분 등 셰익스피어만의 언어적 특징을 반영했기에 공연 시간이 무려 200분에 달한다고.


게다가 셰익스피어가 희곡 <리어 왕>을 집필했던 당시의 유럽은 페스트라 불리는 흑사병이 만연했는데요,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연극 <리어 왕>에도 전염병에 대한 대사가 여럿 등장한다고. 이는 연극 <리어 왕>이 코로나19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다양한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를 던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어요.


리어는 모든 걸 가졌던 인간입니다. 왕국, 사랑하는 세 딸부와 권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을 피할 수 없었고 영원할 것 같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제야 두 딸의 현란한 말이 아니라 코딜리아의 침묵에 진실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미 코딜리아가 허무하게 죽어 버린 뒤였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탁월함이 바로 이 결말에서 드러납니다. 사실 역사 기록에선 코델리아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습니다. 리어는 코델리아와 연합해 두 딸을 내쫓고 왕국을 되찾습니다. <리어 왕>과는 사뭇 다른 결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의 뒤늦은 후회, 코델리아의 죽음, 이에 절망한 리어의 절명으로 이야기를 맺으면서 비극성을 최고로 끌어올립니다. 그 결과 <리어 왕>은 조지 버나드 쇼*가 꼽은 “가장 위대한 비극”이 되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 세계적인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결국 인간은 사는 내내 허상을 붙들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그 모든 게 덧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비극적인 존재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부처도 “삶은 고통”이라 한 것을 보면, 동서고금에 삶은 늘 만만치 않은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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