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나무입니다.
나는 나무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보실 사진은 나를 ‘녹색예술가’라고 부르던 사진가가 나의 생애를 기록한 것입니다. 내 주위에는 나보다 아름답고, 오래 살고, 그래서 더 유명한 나무들이 많은데 이렇게 사진집의 주인공이 되어 많은 분 앞에 서게 되니 어색하기만 합니다. 나는 서울 강남 재건축 저층 아파트에서 40여 년간 살아온 나무입니다. 우리들은 이 시간동안 5층 높이의 아파트 전체를 가릴 정도로 자랐습니다. 친구들 중엔 아파트 10여 층 높이보다 더 높이 자란 나무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10년, 20년, 30년, 40여 년 동안 자라면서 녹색의 시간을 조금씩 쌓았습니다. 건물만 덩그러니 서있던 아파트는 어느새 우리들의 모습과 함께 살아있는 녹색 풍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풍경이 되면서 동시에 우리가 있던 주위 공간의 풍경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매년 새로운 곳에 이사 온 것 같다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풍경은 내년엔 재건축때문에 어떤 모습으로 변화가 될지 예상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내년에 어느 정도 클지, 어떤 방향으로 가지를 틀지, 그리고 어떻게 잎을 만들지 미리 정하지 않고 현재의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와 현재를 보는 시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미래를 준비합니다. 그것을 예상하고 계획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놀라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미래를 그린 모습을 현실에서 똑같이 만들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런 미래의 그림 속에는 현재와 관계되고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 빠져있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미래의 그림을 그릴 때 현재의 굴곡 있는 시간과 공간이 완벽히 사라진 무결정 무결점의 백지에 그려서일까요? 그림 속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과 공간은 지워지고 사라져서 깨끗하고 완벽한 미래 세계만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내가 살던 이곳에도 아파트 재건축 논의가 나오면서 사람들은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앞당겨서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는 재건축 조감도에는 과연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파트 재건축에 모두 빠져 있을 때부터 오히려 우리들은 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요? 언젠가부터 매년 봄이 오기 전에 우리들의 가지를 치는 전정작업도 사라지면서 우리들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관리에서 벗어난 것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처럼 햇볕을 향해 우리들의 가지를 계속 뻗어갔습니다.
‘이 에세이는 서울연구원·서울특별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수행한 2020년「서울 도시인문학」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습니다’
*다음엔 2부 '우리들의 시간'이 연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