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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일러문 Apr 20. 2022

거울단계

-말레피센트를 위하여-

생각해 보면 눈이 얼굴에 달린 것은 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눈이 손에 달렸다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리라. 그러면 밥을 먹고 귀찮게 화장실에 들어가 입을 벌려 고춧가루를 빼낼 필요도, 짜장소스를 입가에 묻힌채 애인 앞에서 허겁지겁 짜장면을 먹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 솔직히 타인의 눈을 통해서야만 나를 볼 수 있다는 건 극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세상에서 내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니!

정말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는 얼굴이 둥근 편이니까 뱅 스타일의 앞머리는 어울리지 않아", "너는 얼굴이 각진 편이니까 머리는 짧은 편이 좋겠어."

물론 그 옛날에 이런 말을 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 시절에도 연인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을 것이기에, 이성을 만나기 전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법하다. “나 오늘 괜찮아?” 그러나, 만약 질문의 상대방이 나를 몰래 질투하고 있던 연적이었다면? 어쩌면 인류는 오래전에 멸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거울은 이러한 연유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잘생겨보이고 싶었던 지극히 원초적인 욕망.      


그러니 공상과학 소설적인 상상을 조금 보태자면, 질투에 눈이 먼 거울 속의 내가 거울 밖의 나를 죽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다. 누구 덕에 네가 이쁘게 됐는데?     


고백하자면 나는 거울 앞에서 꽤 오랜 시간 화장을 한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아이라인을 그린뒤 그라데이션이나 하이라이터를 정성스레 칠한다. 특히 데이트를 나가기 직전이면 화장은 더욱 진해진다. 그건 일종의 유희이다. 어쩌면 점성술사의 수정구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몇 시간 뒤 데이트를 할 내가 그곳에 있기에.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부모가 자식의 가능성을 점쳐보듯, 나는 거울 앞에서 몇시간 뒤 내 모습을 점쳐 본다. 거울은 모든 욕망을 실현시킨다.     


그래서 백설공주의 계모도 그렇게 오랜 동안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따라서 거울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은 백설공주님이예요” 라고 이야기 했을 때 계모는 마땅히 절망해야만 했다. 메슬로우의 말대로 인간의 본질이 욕망으로 이뤄진 이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면, 이날  계모 본질을 부정당했으므로 백설공주를 죽일 만도 하다.     


사실, 거울이 항상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은 백설공주라고 말할 이유는 없다. 거울이 평화주의자였다면 그저 여왕님이 가장 아름다우세요 라고 말하면 될 일이다. 그랬다면 독사과도, 난쟁이도, 왕자도 죽음도 모두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거울은 여왕의 심연을 보았다. 그 심연은 살인을 원했다. 그는 텅 빈 평화보다  질투로 가득찬 도살을 바랐다. 그랬기에 여왕은  존재해야했다. 존재하는 자만이 누군가를 도륙할수 있므로. 

존재는 본질적으로 소멸을 긍정한다. 그래서 존재는 필연적으로 평화와 불화한다.


른말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죽음을 위해 등장했다.


사실 말레피센트는 오래동안 그 누구도 아닌 존재였다. 늙은 왕에게도, 어린딸에게도 말레피센트는 먼저 죽은 여왕의 자리를 대신하는 인형에 불과했다.


여왕은 누구에게도 욕망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화는 전적으로 여왕의 부재를 통해 완성되었다.


여왕은 매일 거울을 보았지만 거울은 그 누구도 비출 수 없었다. 그 누구의 시선도 거기에는 존재할 수 없었기에. 그리하여 여왕이 최초로 “거울아 이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라고 말을 한 순간,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충성스런 거울은 그렇게 목숨을 바쳐 주인에게 생명을 줬다. 비로소 여왕은 생애 처음으로 탄생한 것이다.


오늘도 거울은 무수한 욕망들은 만들고 죽인다. 마치 탄생과 소멸을 무한히 반복하는 듯 하다. 거울 앞에 놓인 나는 원피스를 입어보았다가, 크롭티를 입어보았다가, 정장을 입어본다. 내 욕망은 무수히 많은 시선들 앞에서 패션쇼를 한다. 욕망되는 나는 살아남고, 욕망되지 않는 나는 소멸한다. 시선들은 내가 아니지만 시선 속의 형상은 나이다. 그렇게, 나는 거울 앞에서 남자친구가 되었다가, 회사동료가 되었다가, 무대앞 관객이 된다. 나인듯한, 내가아닌, 나같은 나. 정도랄까. 그렇게 광기어린 난도질이 시작된다.


이쯤되니 주인과 그림자가 전복된 기분도 든다. 어쩌면 주인은 거울 속 내가 아닐까 싶다. 거울 속의 나만이 온전히 거울 밖의 나를 욕망하므로. 존재는 욕망하는 대상에 의해 규정지어 지기에.     


그렇게 따지고 보 나도 말레피센트와 별반 차이가 없는 듯 하다. 거울 안의 주인은 끊임없이 그림자를 죽인다. 나는 수백번도 더 죽었던 그림자인지 모른다. 그러나 어쨋거나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나는 남자친구에게 예뻐보여야 하니, 어쩌면 그게 당연한 숙명이 아닌가 싶다.


눈이 손에 달랐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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