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내 마음을 알아주고 싶어서

로버트 드 보드의 <나의 첫 심리상담>

by 김혜정

1908년에 발표되어 100년이 넘게 흐린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동화가 있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영국 작가 케네스 그레이엄이 시력이 약한 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동화로, <해리 포터>의 작가 J. K. 롤링이 어릴 때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동화에는 네 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두꺼비 토드와 토드의 친구 두더지 몰과 물쥐 랫, 그리고 오소리 아저씨 배저가 그들이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으로 사치스럽고 풍족한 생활을 하던 주인공 토드는 좌충우돌 갖가지 사고를 일으키기만 하, 그의 친구들은 힘을 합쳐 위기를 뛰어넘고 문제를 해결하느라 분주하다. 마차와 자동차가 공존했던 20세기 초 영국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험난한 모험의 여정과 우정 이야기. (더 늦기 전에 둘째 아들에게 읽어 줘야겠다.)



로버트 드 보드는 저서 <나의 첫 심리상담>에, 이 유명하다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 나오는 네 명의 캐릭터에 한 명의 인물을 추가했다. 바로 심리 상담을 해주는 왜가리 헤런.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로버트 드 보드는 이 다섯 캐릭터를 캐스팅하여 이 작품을 지어냈고. 왜가리 헤런의 상담 과정을 주된 골개로 하여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현장을 보여준다. 여기서 헤런은 바로 저자 자신이며 자신의 지난 20년 간의 상담 경험을 토드와의 상담 장면으로 빚어냈다.


토드가 열 번의 상담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고 심리적 성장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어느새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인 감정들과 화해하고 진정한 자아 상태를 찾아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제가 멀리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말이에요. 저기, 선생님, 부모님의 양육 방식이 현재의 저를 만들었다고 하셨잖아요. 부모님도 잘 모르고 그러셨겠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원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어요. 누굴 탓하겠어요. 부모님이 정말 원망스러워요. 제 인생은 엉망진창이라고요. 억울해요. 정말 억울해요.”

헤런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휴지를 건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잠자코 앉아만 있었다. 마침내 그만 울고 진정하라는 뉘앙스로 헤런이 말을 건넸다.

“토드 씨, 당신은 갈림길에 다다랐습니다. 이젠 돌아갈 수 없어요. 자, 어느 길로 가시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토드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선택을 하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맞나요?”

“네. 자신의 불행을 두고 얼마나 더 다른 사람 탓을 할 것인가? 토드 씨가 선택할 문제예요.”

“답을 정해놓고 묻는 거잖아요.”
토드가 화를 냈다.

“모두 다 제 탓이라는 거잖아요. 전 인정할 수 없어요.”

“그건 제가 생각하는 답이 아니에요. 비난은 어린이 자아 상태에서 하는 거예요. 아마 당신에게 가장 익숙한 자아 상태일 겁니다. 그런데 당신이 어른 자아 상태라면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까요?”

토드는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온통 상반되는 감정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이 아주 중요한 자아발견(self-discovery)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었다.
(p.163-164)


토드는 헤런과 상담을 하면서 스스로 자아를 발견하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부모님에게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갚아주고 싶고 복수하고 싶지만 헤런은 그들을 비난하고 탓하기보다는 용서를 하라고 한다.


가끔씩 과거의 기억이 건드려질 때마다 토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분노가 폭발해서 엄청난 비극이 펼쳐질 것 같아 두려웠지만 늘 그랬듯 그저 참고야 말았다. 그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다시 마주한 토드, 토드는 그다음 상담 때부터는 자신의 삶 전체를 헤런에게 털어놓으면서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아 상태를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헤런(로버트 드 보드)이 사용한 상담 기법은 ‘교류 분석’이었다. ‘교류 분석’은 캐나다 출신의 정신과 의사였던 에릭 번(1910.5~1970. 7.15)이 창시한 상담 기법으로 자아 상태를 ‘어버이 / 어른 / 어린이’ 자아 상태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제시한다.


어버이 자아 상태

어버이 자아 상태일 때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양육하려 든다. 부모에게서 배운 신념과 가치관을 말과 행동으로 되풀이함으로써 자기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자아 상태에서는 새로운 지식이나 사고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옛것이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자신의 관점에 갇혀버리는 형국이다.


어린이 자아 상태

어린이 자아 상태에서는 좋든 나쁘든 어린 시절의 기분을 경험한다. 오래전 그때의 상황을 재연하고 그때의 기분을 느낄 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깊은 기억 속의 장면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게 부모님 때문인 것을 자각하면 죄책감이 든다. 부모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가 엄격하고 비판적이면 아이는 그에 대처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강한 압박감을 느낀 아이는 순응적인 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순응적인 행동은 의존적인 삶의 방식을 초래하게 된다.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한다.



어른 자아 상태

어른 자아 상태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자아 상태를 말한다. 계획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때 모든 지식과 기술을 바로바로 활용할 수 있다. 어른 자아 상태일 때만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로운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다. 새로운 사실을 고찰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경청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물론 가장 좋은 상태는 어른 자아 상태로 보인다. 하지만 에릭 번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이 세 자아 상태가 모두 중요하다고 했다. 다만 어른 자아 상태일 때만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


어린이 자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남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어린이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야 하고, 우리 자녀들 역시 어른 자아 상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 결코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어른 자아 상태를 대물림하지 말아야 한다. 에릭 번은 세 자아 상태의 공존을 중요시했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어른 자아 상태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 상태만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것이 토드와 나의 공통점이다. 남편의 눈치를 보는 순응적인 유형이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있어도 살갑게 안아준 적은 없는 엄마도 똑같다. 어쩜 그리 비슷할 수 있는지, 이 세상 부모의 결합 유형이 몇 가지도 안 되는 것인 양, 이렇게도 내 상황에 맞아떨어질 수가 없었다.


덕분에 토드가 헤런에게 상담받는 동안 나는 땡전 한 푼 안 내고도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내가 상담 공부를 하게 되면 언젠가 나 자신이 내담자가 되어 상담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책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나 자신을 많이 알아왔고 내 과거와 적극적으로 화해했다고 자부했지만 현실 상담은 나를 바닥까지 끌어내릴지도 모른다. 나 혼자 어른 자아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달게 받겠다. 고통은 기꺼이 나를 성장시킬 원동력이 되어줄 테니.


책을 덮기 전에 다시 한번 저자소개란을 들여다보았다. 로버트 드 보드. 생전 알지 못했던 양반이지만 2020년에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글씨가 박혀 있는데 슬픔이 사무쳤다. 나를 이렇게 상담해 줘 놓고 이미 세상을 떠났다니.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 고마운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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