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어느 날 우리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에 가서 러닝머신 위를 걸었다. 가져간 이어폰을 귀에다 꽂으니 앞에 있는 화면이 연동되어 소리가 이어폰으로 들어왔다. 채널을 한칸한칸 돌리다 문득 강동원에서 멈추었다. 영화 채널이었다. 제목은 《검은 사제들》. 화면도 검고 강동원도 김윤식도 죄다 검었다. 악령을 퇴치하려 무당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검은 사제들》을 볼 수 있는 용기가 되었다. 나의 러닝 최대 시간 40분 리밋이 끝나고 나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내려왔다. 무섭지만 더 보고 싶었다. 어느 날 넷플에 《검은 사제들》이 올라왔다. 보고 싶었지만 혼자 보긴 무서웠다. 언젠간 꼭 보자고 나와 약속만 남겼다.
수업하고 지친 몸으로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는데 큰아들이 티비로 야구를 보면서 똑같은 그 곡을 언제까지 칠 거냐고 물었다. 나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엄마한테 그런 소릴 하느냐고 혼을 냈다. 니가 시험공부 안 하고 주야장천 야구만 보는 자유가 있듯이, 나도 치고 싶은 만큼 피아노를 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 나는 소리를 죽여서 칠 정도로 배려까지 하고 있노라며 말이다. 아들은 자기는 아무런 저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말속에는 저의가 있는 거라고 반박했다.
내 안에 여러 가지 동시다발적으로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분노로 뿜어져 나왔다. 큰아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나니 분노의 기운이 뻗어 올랐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와 그 분노에 힘입어 《검은 사제들》을 틀었다. 분노는 또다른 용기를 만들어냈다.
강동원은 누이를 구하지 못한 죄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채 도망만 다니고 있었다. 퇴마의 스토리보다 내 눈엔 이 장면이 들어왔다. 이 장면을 보다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썼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못난 과거, 숨기고 싶은 과거,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 과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과거 속의 그는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 연약했고 그래서 상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