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코로나19 팬데믹의 긴 터널이 끝을 보이면서, 올해는 자동차 관련 행사도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쾌청한 날씨와 휴가 시즌이 겹치는 6~8월 사이, 지난 몇 년 간 제대로 열리지 못했던 각종 자동차 페스티벌과 콩쿠르가 개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도 많은 자동차 마니아들의 기대를 모으는 축제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 최대의 자동차 축제이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축제"로 불리는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Goodwood Festival of Speed, FoS)입니다.
FoS는 매년 6월 말에서 7월 초 경 영국 굿우드 지역에서 개최되는 자동차 페스티벌입니다. 처음에는 소규모 지역 축제로 시작됐지만 그 규모가 커 지면서 오늘날에는 웬만한 국제 모터쇼보다도 높은 인지도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요. 올해도 개막을 앞둔 FoS의 명성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굿우드 페스티벌의 유래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런던 남부 웨스트 서식스(West Sussex) 주에 위치한 굿우드 에스테이트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사실 이렇다 할 볼거리가 많지 않은 지역입니다. 그저 비행장과 오래된 굿우드 서킷(Goodwood Motor Circuit)이 있을 뿐이었죠.
굿우드에 비행자과 서킷을 지은 건 지역의 대부호이자 귀족인 9대 리치몬드 공작 프레드릭 찰스 고든-레녹스(Frederick Charles Gordon-Lennox)였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엄청난 비행기 마니아였던 그는 굿우드 에스테이트의 토지 4,900헥타르(약 1,500만 평, 여의도의 16.8배)를 상속받은 뒤 그곳에 비행장을 짓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비행장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자동차 경주장까지 건설하죠. 그는 비행기광이자 동시에 자동차광이었으니까요.
굿우드 서킷은 1950~60년대 영국 모터스포츠의 주요 무대 중 하나였지만, 안전 문제로 공식 모터스포츠 대회를 개최하지 못하게 되면서 지역은 점점 쇠퇴합니다. 그렇게 굿우드는 점점 과거의 명소로 잊혀져 갔습니다.
그런 굿우드를 되살리고자 했던 건 9대 리치몬드 공작의 손자인 찰스 헨리 고든-레녹스(Charles Henry Gordon-Lennox), 일명 마치 백작(Lord March)이었습니다. 현재는 공작위를 물려받아 11대 리치몬드 공작이 된 그는 할아버지 못지않은 자동차 마니아였는데요. 굿우드 지역에 다시금 모터스포츠의 열기를 되살리기 위한 행사를 기획합니다.
처음에는 굿우드 서킷에서 공식 레이스를 유치하려 했지만, 오래된 서킷을 현대적 안전 규정에 맞춰 보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자신의 땅에서 특별한 자동차 축제를 열기로 했습니다.
1993년 6월 20일 일요일, 리치몬드 공작가의 저택 앞마당에서 제1회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가 개최됩니다. 마치 백작은 영국 각지의 자동차 콜렉터들을 섭외해 마당에 역사적인 클래식카와 레이스카, 각종 희귀 콜렉션들을 전시했는데요. 르망 24시 내구레이스 결승 당일과 겹쳤음에도 불구하고 2만 5,000명에 달하는 관중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합니다.
뜨거운 반응에 확신을 얻은 마치 백작은 매년 행사의 규모를 키웠습니다. 일요일 하루만 진행되던 행사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나흘 간의 축제로 확대됐고, FoS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영국 외의 유럽, 미국, 일본의 콜렉터들까지도 앞다퉈 자신의 차를 FoS에 출품하기 시작했죠. 또 자동차 회사들도 박물관에 고이 모셔뒀던 소장품을 굿우드로 공수해 왔습니다.
오늘날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는 나흘 간 30만 명에 가까운 관중을 동원하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페스티벌로 성장했습니다. 굿우드 지역은 영국 자동차 문화의 성지가 됐고, 많은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굿우드에서 신차를 공개하는 등, 모터쇼 이상의 위상을 지닌 자동차 업계의 연례 행사로 자리잡았습니다.
굿우드 페스티벌은 아름다운 굿우드 하우스의 잔디밭에서 개최된다는 것 외에는 일견 유럽 각지에서 열리는 다른 자동차 축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행사를 특별하게 만드는 포인트가 있는데요. 바로 행사 기간 내내 펼쳐지는 힐클라임 이벤트입니다.
총연장 1.89km의 힐클라임 코스는 굿우드 하우스 앞, 행사장을 가로지르는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뤄져 있는데요. 보통 멋진 차들을 가만히 세워 두는 다른 행사들과 달리, 굿우드 페스티벌에서는 수백 대의 출품 차량들이 쉬지 않고 힐클라임 코스를 내달립니다. 개중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은 신차, 백억 원대를 호가하는 하이퍼카, 세계에 한 대 뿐인 클래식카, 방금 막 레이스를 마치고 공수된 온갖 레이스카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모터쇼"라 불리는 이유죠.
힐클라임 코스의 종점이 있는 언덕 위에서는 2005년부터 포레스트 랠리 스테이지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숲속에 만들어진 미니 랠리 코스인데요. 힐클라임 코스에 온로드 레이스카와 각종 신차들이 있다면, 랠리 스테이지에서는 전설적인 랠리카들이 쉴새 없이 모래먼지를 흩날리며 질주합니다.
관람객들은 평소에 보기 어려운 차들이 살아 숨쉬며 달리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운이 좋다면 동승할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또 힐클라임이나 랠리 스테이지에 동승하지 못하더라도, 주행을 준비하며 대기 중인 패독에서 차들을 가까이 감상하고, 차주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차주의 허락을 얻어 운전석에 앉아 보거나 차에 기대어 사진을 찍을 수도 있죠.
완성차 회사들의 참여가 늘면서 볼거리는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완성차 회사들은 파빌리온(부스)을 설치하고 저마다 개성 넘치는 방식으로 브랜드의 역사와 최신 기술을 홍보합니다. 단순 전시를 넘어서 브랜드마다 별도의 체험 공간을 만들어 간단한 시승이나 오프로드 체험 등을 제공합니다. 또 각종 행사 기념품도 양손 두둑히 챙겨갈 수 있습니다.
제조사들 입장에서는 모터쇼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참가하면서 관람객들에게 더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할 수 있다는 이유로, 매년 규모가 커 지는 추세입니다. 또 따끈따끈한 신차가 힐클라임 코스를 질주하는 모습을 선보여 홍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죠. 지난해에는 제네시스가 한국 브랜드 최초로 FoS에 참가해 G70 슈팅브레이크를 출품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스턴트 쇼, 미래차 기술 경연, 클래식카 경매, 에어쇼 등 다양한 부대행사가 펼쳐집니다. 하루 만에 모두 둘러보기 어려울 정도로 구경거리가 많기 때문에, 인근 호텔에서 묵거나 아예 캠핑카를 타고 와 3박4일의 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즐기는 관람객도 많습니다.
굿우드 페스티벌이 이처럼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박제된 행사가 아닌, 살아 숨쉬는 자동차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박물관에서나 보던 차들이 타이어를 태우며 질주하고, 다양한 체험 행사를 통해 남녀노소 누구나 자동차 문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아름다운 풍경과 영국 특유의 상류층 문화까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지녔습니다.
올해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는 M 50주년을 맞이한 BMW가 호스트를 맡아 M3 투어링과 LMDh 레이스카를 세계 최초로 공개합니다. 이 밖에도 메르세데스-AMG 원, 기아 EV6 GT, 렉서스 일렉트리파이드 콘셉트, 폴스타 5 프로토타입, 마세라티 그리칼레 트로페오, 포르쉐 LMDh 레이스카 등 수십 종의 신차와 역사적인 레이스카, 클래식카들이 출격을 앞두고 있습니다. 권태로운 주말, 굿우드 FoS 온라인 중계와 함께 영국 자동차 문화의 정수를 체험해보면 어떨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