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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짱 Mar 12. 2022

레벤느망

영화 안의 결말은 '안'만이 선택할 수 있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1971년 4월 5일, 프랑스에서는 '낙태할 자유'를 요구하는 선언문이 잡지에 실렸다.

수많은 여성이 이 선언문에 서명을 남겼으며, 여성 지식인들이 모여 낙태의 불법화에 대한 반대를 이야기했다. 이윽고 1975년 보건장관 시몬 베유 때에 임신중지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며 이들의 자유는 정당하게 보호되었다. 이로부터 50여년이 지난 때, 대한민국에서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난다. 여성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화제 중 하나, '임신 중절'에 관하여 주인공 안이 들려주는 이야기. <레벤느망>은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원작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이다.


레벤느망의 플롯은 단순하다. 원치 않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대생, '안'의 고립과 당시 여성의 낙태에 대한 적나라한 현실을 담고 있다.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소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잔혹하게, 혹은 안의 고통이 피부에 와닿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임신'이라는 주제에 대해 일말의 공포를 느껴보지 못했을 여성(혹은 임신 가능한 신체 보유자)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내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다.

임신중절에 대한 고백은 아니고, 그저 단순히 내 병증에 관한 이야기다. 10대 때부터 위장이 약했던 나는 자주 배앓이를 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분명히 여기 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내 의지와 다르게 진동하던 뱃가죽을 기억한다. 그 위에 손을 올리고 있으면 내 몸은 그저 내 몸이 아니구나라고 느끼게 되기도 했다. 낫고 싶다고 말해도 나을 수가 없고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내 안을 지배하는 병. 


영화 속에서 안은 임신을 '병'이라고 표현한다. "여자들만 걸리는 병이에요.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

나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고 바라지 않았던 별개의 움직임. 그리고 서서히 나의 외부를 장악하는 침입자. 조심스레 계획하고 하나하나 진행한 일이 아니라 갑작스레 맞아들인 '사건'이라면 기쁨 같은 감정보다야 당혹과 공포가 먼저 나를 지배하게 된다. 신체적으로 증상이 없을 초반에야 외부적인 일에 더 관심이 쏠리고 걱정을 느끼지만, 그 '병'에 신체가 지배당하기 시작하면 공포는 더욱 더 내밀하게 가까워진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다시 말하지만 이건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다.

주인공 안의 고백은 처절하다. 그만큼 세세하게 해체된다. 안은 자신이 임신중절을 위해 했던 일을 하나하나 우리 앞에 털어놓는다. 낙태를 돕지 않겠다는 의사를 붙잡고 협박하니 오히려 뱃속의 태아를 강하게 하는 약을 거짓으로 처방 받았던 일, 대바늘을 스스로의 몸 속에 넣었던 일, 임신중절을 돕는 의사를 은밀하게 찾아다녔던 일. 영화 내내 안은 떨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 표정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닿을 정도로 가까운 숨결의 거리에서, 공포와 고독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코 영화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터다.


불법이라는 규제 안에서, 사람들은 누구도 안의 두려움을 도와주지 않는다. 자신에게 임신을 진단 내린 의사는 '절대 돕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안을 돌려 보내고, 다음 의사는 오히려 안을 속이기까지 한다. 남자인 친구는 거절의 의사를 표하더니 안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가장 친한 단짝 친구들은 '우리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라며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은 자신이 믿고 있던 자신에게서 벗어난다. 냉장고에서 남의 음식을 훔쳐 먹고 헛구역질을 하며 팔을 둘러 자신의 몸을 최대한 가리며 웅크린다. 누가 이 여성의 공포를 감당해줄 것인가.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감당해야지'라고 말하기엔, 함께 감당하고자 찾아갔던 막심은 "네가 알아서 해결한 줄 알았다"며 오히려 안의 태도를 비난한다. <레벤느망>을 혹자는 낙태라는 끔찍한 일을 하려고 안달난 여대생의 범죄 고백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이 영화는 그저 법의 제도 내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의 공포와 고통을 여실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안은 영화 내내 한번도 자신의 뱃속에 있는 무언가를 '아이'로 취급하지 않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언젠가는 아이를 가질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아이와 인생을 바꾸고 싶진 않아요.


처절한 외침.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나와 내 몸, 그리고 날 둘러싼 환경,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거라는 불안한 깨달음을 얻은 어린 여성은 그렇게 혼자가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혼자'로 끝나지 않는다. 안의 고군분투 끝에 스며드는 조력자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심지어 안을 질투하고 싫어했던 라이벌조차도 안의 비극을 보고 손발을 덜덜 떨면서도 그를 돕는다. 오히려 매도하고 추저분한 여자라고 외쳐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 모든 게 끝날 수 있다는 공포를 그들은 안다. 내가 바라지 않았을 때에, 내가 쌓아왔던 것들이 산산조각 날 거라는 두려움. 처절함. 슬픔. 절망감. 무력감. 이 모든 단어들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내 앞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안을 외면할 수 없을 테다. 그러니 우리는 손을 뻗어 다른 손을 맞잡고, 네 이름 위에 내 이름을 올리고, 나는 너를 응원한다는 말을 얹으며 살아야 한다. 이건 그저 안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벽'이므로.


그리하여 소설 <사건>에서 적힌 대로 안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잉태했다. 

그리고 사건이 끝났다.


우리는 살아간다. 안 역시 살아간다. 안을 잔혹하다고 비난하든 그럴 만하다고 응원하든 안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관객은 스크린 바깥에서 자신을 보고 있지만, 영화는 안의 이야기이므로…… 스크린 안의 안에게는 계속 나아갈 의무와 권리가 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럴 의무와 권리가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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