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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8.

일자리를 구하게 되자 생활을 루틴화 해야 했다. 오전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학교에 가기 위해 다양한 루트를 도전해보았고, 덕분에 런던 곳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학원이 끝난 후 근무가 없는 날에는 아침에 집에서 싸 온 샌드위치를 들고 시내에 널려있는 공원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근무는 주로 금요일 저녁과 주말에 스케줄이 잡혔는데, 영국인들이 대부분 그 시간에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거의 고정적으로 근무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처음 가지고 온 100만 원이라는 돈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사용해 버렸기에 부모님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께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조금씩 저금을 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혈기에 노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축구와 농구를 좋아했던 나는 운동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문제는 어디서 그들을 만날까 하는 것이었다. 해외 어학연수나 유학을 하러 가면 현지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기 마련이다. 한국인 친구보다는 현지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어학 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노력하지 않고 그러한 결과만을 바라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어떻게 하면 외국인 친구를 사귈 수 있는지 어디서 그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나의 답변은 간단하면서 현실적이다.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운동을 좋아했다. 축구를 하다 크게 다친 경험도 있지만, 끊임없이 운동을 하고 싶어 했다. 사실 운동 자체도 즐겁긴 했지만, 팀 운동을 하면서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고 볼 수 있다. 공통 관심사가 사람을 얼마나 수다스럽게 만드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모두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운동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낯선 동네에서 운동할만한 곳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관심이 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맥도날드에서 같이 일하던 흑인 친구에게 농구를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Do you play basketball?"(너도 농구할 줄 알아?)

"I like it"(좋아는 해.)

"You should be tall."(키가 더 커야 돼.)

그는 작은 나를 비웃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그가 말한 대로 나는 키가 아주 작아 농구를 잘하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좋아한다고 했잖아! 농구할만한 데를 알려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줄게."

그는 한바탕 크게 웃더니 근처에 있는 공원을 알려주며 돌아오는 토요일 정오에 그리로 오라고 했다. 영국의 3월 날씨는 여전히 흐렸지만, 한낮에는 운동하기에 아주 적절했다.     

그가 말한 대로 토요일 정오에 농구장으로 나갔다. 사실 오후 4시부터 근무해야 하는 스케줄이었지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운동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도착했을 무렵 농구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몇몇 아시아 사람들도 보였고, 백인들과 흑인들도 섞여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흑인 친구는 나에게 몇 명을 소개해 주었고, 곧 사람들을 모으더니 게임을 시작했다. 키가 190cm를 넘었던 그 친구는 농구 코트에서 아주 유명했다. 런던에 온 이후 첫 운동이어서 자신이 없었지만, 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웠다. 다행히도 런던 길거리 농구의 수준은 한국의 것과 비교하면 그리 진지하지도, 수준이 높지도 않았다. 주로 개인기 위주의 플레이였고, 중간중간 장난 섞인 행동들로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가 계속됐다. 흑인 친구는 열심히 뛰어다니는 나를 보고는 엄지를 치켜들며 '굿 플레이어'라고 칭찬해 주었다. 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익히게 되었다. 학원에서는 알려주지 않을 여러 가지 다양한 감탄사의 사용법을 알게 된 것이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동양인 친구가 나에게 와서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그 역시 한국어로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 친구의 이름은 진명이었는데, 진명이 덕분에 함께 온 서너 명의 친구와도 친구가 되었다. 그중 한 명은 홍콩 출신의 영국인 데렉이었고, 나머지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인 친구는 한국인 친구대로 현지의 정보를 공유하고 외로움을 달래기에 좋은 친구가 되었고, 외국인 친구는 외국인 친구대로 영어를 배울 수 있어 좋았다. 내 영어 실력은 아주 미천했지만 일을 하면서, 그리고 친구들과 운동을 하면서 점점 내 것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나둘 외국인 친구들이 늘어가면서 그들과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고, 영어는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영어는 언어이다. 어떻게 하면 영어가 늘까? 핵심은 '노출'이다. 어떠한 환경이든 노출이 많아지게 되면 그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노출보다 더 확실하게 영어를 발전시킬 방법은 없다. 우리가 학교에서 혹은 학원에서 수업 시간에 큰 소리로 문장을 따라 읽고 듣기 평가를 하고 원어민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모두 노출을 늘리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노출이 늘어나면 영어는 늘고 싶지 않아도 늘게 된다. 노출을 늘리는 방법은 노출이 있는 곳에 다가가는 것이다. 나는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운동하는 곳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노출을 늘렸다. 어떠한 취미 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노출을 확대하는 좋은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종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학업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됐건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과 지속해서 교류하는 것이 필요하다.     

농구를 하면서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주기적으로 만났다. 특히 진명이는 나와 고향이 같았고, 심지어 아버지들의 회사 또한 같았다. 옥스퍼드 대학을 다니던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유학 생활 내내 그를 통해서 정말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비록 한국으로 돌아온 후 대부분의 인연이 끊기긴 했지만, 유학 시절 사귀었던 다양한 친구들과의 교류로 내 경험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7시 정도에 학원으로 출발한다. 런던 4존에 위치한 곳에 살던 나였기 때문에 1존에 위치한 학원까지 가는 길은 다소 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존으로 들어가는 지하철 티켓의 비용은 30% 가까이 비쌌기 때문에 이 금액을 아끼기 위해 2~4존까지만 교통권을 끊고, 1존에서는 버스로 이동했다. 다행히도 버스는 구역(Zone)에 구애받지 않고 무제한으로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루트를 선택하는 것이 시간상으로는 약 30분 정도 더 걸리지만(기차 한번, 버스 두 번을 타야 했기 때문에), 비용적으로는 확실히 절약을 할 수 있었다. 유학생들뿐 아니라 많은 런더너가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학원 수업은 12시경에 마친다. 맥도날드 근무가 없는 날에는 집에서 싸 온 샌드위치를 들고 친구들과 주변 공원을 찾아 도란도란 샌드위치를 먹으며 런던 시내를 구경했다. 나처럼 매번 샌드위치를 싸 오는 친구가 많지는 않았다. 사실 런던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사 먹는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다. 당시 한화로 2,500원 정도면 나쁘지 않은 샌드위치를 하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마저도 사치였기 때문에 그들처럼 호사를 누릴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못했다. 대신 매일 저녁 동네 슈퍼에서 사놓은 식빵에 햄과 치즈를 한 장씩 올리고 이를 포장해 가방에 넣고 다녔다. 많지 않은 양이었지만 점심을 견디고 나면 저녁은 집에서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참을 만했다.     

맥도날드에서 만난 주용이가 주말 아침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주었다. 일요일 아침에 한 시간만 배달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한 시간 일한 대가로 13파운드(약 26,000원)의 대가를 현금으로 즉석에서 받으니, 당시 최저시급이 5.25파운드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나름 괜찮은 조건이었다. 토요일 저녁에는 맥도날드에서 일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친구들과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일요일 새벽 신문 배달이 상당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 단 한 번도 빼먹은 적은 없다.     

이렇게 루틴 한 생활을 하게 되자 재정 상태도 빠르게 안정화되어갔다. 한 달 방값으로 180파운드를 내고 식비로 100파운드를 내니 숙식으로 280파운드가 들었다. 거기에 한 달 치 교통비가 약 80파운드가량 들어가니 전체 기초 생활비는 360파운드, 한화로 72만 원 수준이었다. 맥도날드에서는 학생들에게 주 20시간 이상 근무를 시키지 않았다. 보통 주말 3일을 하루 7시간씩 근무했는데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주 18시간 정도였다. 당시 최저 시급이 5.25파운드였는데 이를 계산하면 주급은 94.5파운드, 한 달로 계산하면 378파운드가 넘었다. 여기에 신문 배달로 매주 13파운드는 현금으로 들어오니 한 달 수입이 거뜬히 400파운드를 넘게 되었다. 처음 런던에 올 때는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빠르게 안정화되고 나니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집주인 형님이 가끔 소개해준 청소 일을 따라가면 하루에 100파운드를 벌어오는 날도 있었다. 물론 이곳에 온 주목적이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학원을 빠지고 가야 하는 청소 일을 자주 하지는 못했지만, 간혹 이렇게 한탕(?)하고 나면 든든한 주머니만큼 마음도 든든했다. 두 달 정도가 지날 때쯤에 하숙을 끊고 자취를 시작하니 부식비가 거의 절반 가까이 절약되었다. 대부분 주말 식사는 맥도날드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여기저기서 얻거나 중고로 사 온 주방 집기들로 충분히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해본 요리는 맛을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 먹을만한 요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부모님으로부터 200만 원을 추가로 지원받았지만 결국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그 돈만큼을 고스란히 모을 수 있었다. 사실 연수가 끝난 후 한 달 정도 유럽 여행을 하기 위해 모아둔 돈이긴 했다. 후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유럽 여행은 좌절되면서 계획과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결국 나는 100만 원으로 런던에서의 정착에 성공한 셈이다. 100만 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던 나였지만 악착같이 벌고 지질하리만치 아껴서 결국 내 힘으로 이루어 냈다. 경제관념이 확실해진 것은 덤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불편하고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노력에 비례해 빠르게 안정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 자체도 아주 즐거웠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면 시간은 말 그대로 날아간다. 2월에 시작한 나의 어학연수 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매일 색다른 나날이었다. 런던이라는 곳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수없이 많은 배경의 사람들이 서로 섞여 살아가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 20년 동안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 짧은 6개월 동안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경험들로 인해서 다소 보수적이었던 나의 고정관념도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된 기간이다.     

그렇게 여름이 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기차를 타고 복스홀역에서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를 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평일 아침 출근 시간에 차가 막히는 것이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통 신호와 상관없이 차들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항상 기차나 버스의 정체에 관대한 영국인들이지만, 이날만큼은 지독한 차 막힘 때문인지 버스 안의 사람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둘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나 또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앞뒤로 꽉 막힌 도로를 확인하고는 버스에서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버킹엄 궁전 앞의 호스 가드 주변으로 많은 경찰이 있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고 학원을 향해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약 30분을 걸어 학원에 도착했다. 학원에 들어서자 선생님 중 한 명이 나를 맞았다. 나는 길이 막혀 늦었다고 설명하려 했으나 그녀는 내가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교실로 인도했다. 교실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잠시 후 선생님이 우리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조금 전 킹스크로스역 근처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습니다. 우선 부모님들께서 걱정하실 테니 모두 리셉션으로 내려가 각자 집에 전화를 걸어 안전하다고 알려주세요. 오늘 수업은 없지만 지금 집으로 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니 안전해질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주세요."     

그랬다. 'London Bombings'이었다. 2005년 7월 7일 일어난 폭탄테러로 약 700명이 다치고 56명이 사망한 아주 심각한 폭탄 테러였다. 이슬람 계열의 소행으로 알려진 이 자살 테러 사건은 911 테러 이후 또 한 번 국제사회를 공포에 떨게 한 무서운 사건이었고, 그 사건이 일어난 곳에 내가 있었다. 킹스크로스역은 우리 학원과 불과 2.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침 9시경이니 한국시간으로는 저녁이었는데, 부모님은 테러에 대해 아직 들은 바가 없는 듯했다.

"엄마, 저예요. 여기 사고가 났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고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 알았어."

짧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이 전화를 할 때만 해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했다.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카페로 내려가 뉴스를 시청했다. 뉴스에서는 내내 사건에 대해서 생중계를 하고 있었는데, 사태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런던의 주요 지하철 2곳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있었고, 버스 한 곳에서도 동시에 폭발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버스였다. 30번 버스. 그날 오후 내가 타기로 한 버스였다. 나는 그날 오후 30번 버스를 타고 해크니(Hackney)에 있는 쇼핑몰에 갈 예정이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폭탄테러 시간이 오후였다면? 아찔한 일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일어난 테러였기에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     

학원에서 추가 소식을 기다렸다. 아침 9시 반 정도에 도착해서부터 오후 4시가 다 되어서까지 학원 근처에 살던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생이 학원에 갇힌 채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늦은 오후까지도 이제 안전하니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들에게 문의해보았지만, 아직 안전하지 않으니 조금 기다려보라는 같은 대답만 들려줄 뿐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학원에서 기다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런던 중심에 있는 학원이었기에 집보다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판단이 들었다. 몇몇 학생들과 이야기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테러범을 소탕했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했지만, 아침 시간 이후로 몇 시간 동안이나 추가 위협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기에 학원 선생님들도 집으로 가겠다는 무리를 막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뉴스를 통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운행 중이라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몇몇 학생들과 학원 문을 열고 나왔다. 거리는 평소와 180도 다르게 변해있었다. 아마 실제로 전쟁이 나면 그러한 광경일지 모른다. 거리는 텅 비어있었고 상점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을 제외하면 거리에 행인이라곤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우리는 버스를 타보려 했지만, 이 난리 속에 버스가 다닐 리 없었다. 게다가 이번 테러의 주 배경이 버스였으니 하는 수 없이 도보로 워털루역으로 향했다. 학원에서 걸어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거리였지만, 지금 우리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경찰이 거리에 가드 라인을 설치하여 행인들이 지나다닐 길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은 안전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버스로 20여 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 워털루역에 도착한 나는 기차에 오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영화에서나 볼만한 테러라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세계 제일의 도시 런던에서 말이다. 천만 다행히 나와 내 주변의 누구도 다치지는 않았지만, 공포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최근에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세계 곳곳의 테러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때의 두려웠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아마 당시 런던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는 해외에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예방도 어렵다.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 참 안전한 나라이니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일을 겪는 것은 아니고, 설령 이와 비슷한 일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절망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험(리스크)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 때문에 무언가를 도전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험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전쟁 중 총알이 오고 가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도 말이다.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나 스스로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사고가 일어나려면 언제건 어디서건 일어날 수 있다.     

정신없이 시작된 나의 어학연수 생활은 정말 다이나믹함의 연속이었다. 극단적으로 가난해 보기도 했고 남들이 겪어 보지 못한 위험에 놓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절대 맛보지 못했을 마음의 여유도 즐겨 보았고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신나게 놀기도 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난했기에 즐기지 못한 영국의 다른 면모도 많다. 이 기간에는 여행도 많이 다니지 못했고, 한 번쯤은 가볼 만한 축구경기장도 가보지 못했다. 심적인 여유보다는 물질적 여유가 없었기에     

결국은 영국도 사람 사는 동네였다. 결국은 영어도 사람들의 언어였다. 한국에서와 다를 것은 거의 없다. 사람들을 만나고 운동을 좋아하던 나는 한국에서처럼 운동을 통해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즐겁게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는 나였기에 그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런던이라는 곳에 적응하게 되었고 영어도 제법 익숙해졌다. 한국에서의 내가 영국에 와서 전혀 다른 내가 되지는 않았다. 무수히 많은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소심해질 때도 있었지만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나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서 누구와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사람 자체가 일순간에 바뀌지는 않는다.     

무언가 완전히 다른 삶을 생각했다면 그건 착각이다. 사람 사는 것이 어디서나 똑같다고 하듯이, 살던 환경, 사귀던 사람, 사용하던 언어가 달라질 뿐, 삶의 방식은 내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것과 같다. 나라는 사람이 외향적이고 활달한 사람이라면 조금 쉽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것이고, 내가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라면, 또 그 방식대로 천천히 차근차근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다 살아진다. 내가 적응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시간은 인간을 살아가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불편하고 불안하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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