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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10.

한국으로 돌아와 한동안의 시차 적응을 마치자 아주 바빠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을 만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1년을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왔지만, 돌아오니 현실이었다. 한국은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매일같이 친구들을 만나고 늦게 들어오는 나에게(평소 같았으면 이미 난리가 났겠지만) 이상하리만치 크게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이제야 나를 어른으로 인정하시는 게 아닌가 싶었다. 1년 동안의 고생을 짐작으로 아시기에 아무 말씀을 안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나에게는 약 두 달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진 셈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나자 혹독한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몸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와 현실에 적응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런던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학교생활은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1년 만에 다시 가족 눈치를 보게 되자 답답함은 곱절이었다. 친구와 함께 자취를 시작했음에도 답답함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1년 동안의 공백 때문인지 학교 선후배들과도 그리 가까운 관계를 맺지 못했다. 교내외 포럼과 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열심히 학교생활에 임했지만, 몇몇 교수님들의 수업을 제외하고는 학교생활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2006 월드컵으로 축제 분위기였지만 내 삶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른데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더 재미있고, 익사이팅한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먼저 돈을 벌어야 했다. 학교생활을 병행하면서 돈을 벌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어학연수 경험으로 학원강사 자리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주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는데, 학원에서 인기가 쌓여 파트타임이긴 했지만 나름 스타강사 대접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심각한 문법이나 시험을 위한 수업이 아닌 대화나 읽기 위주의 수업이었기에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했다. 런던에서의 사진과 함께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줄 때면 아이들의 눈은 아주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름 방학에는 중고등 학생을 대상으로 특강도 담당했다. 특강 일정 때문에 방학을 만끽하기엔 시간이 부족했지만, 수입만큼은 상당히 짭짤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오토바이를 장만했다. 온라인에서 만난 같은 기종의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과 함께 주말과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투어를 다녔다. 내가 살던 울산은 부산, 경주, 포항이 모두 멀지 않은 거리로, 오토바이를 타고 투어를 다니기에 아주 적절한 위치였다. 런던에서의 답답했던 뚜벅이 생활의 한을 풀듯, 거의 매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한국에도 가볼 만한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다. 울산 정자해변에서 경주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마음마저 맑아지는 기분이었고 한밤에 찾아간 간절곶 해변은 차분한 운치에 시원한 바람이 더해져 답답한 가슴을 탁 트이게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언양 작천정은 비단 벚꽃 시즌뿐 아니라 사시사철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지친 마음을 달래줄 준비가 되어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제는 쉽게 갈 수 없는 내 마음속 힐링 포인트들이 가끔 그리워지곤 한다.     

젊은 나이, 적절한 주머니 사정, 여유로운 시간. 삼박자가 잘 들어맞아 내 인생에서 다시 경험해보지 못할 자유로운 생활이 이어졌다. 누가 보더라도 '팔자 좋다.'라고 말할 만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내 인생 중에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늘 무언가 답답했다. 허한 마음은 항상 무언가 더 자극적인 것만을 쫓아다녔다. 하지만 내 마음에 안정을 줄 그 무언가를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아마 헤어진 전 여자친구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다시 마주하게 된 대한민국 사회의 불편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런던에서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떠올린 적이 없었고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 미래에 대해서 그리 크게 걱정한 적도 없었다.     

런던에서 마음이 편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현재에 집중하느라 과거나 미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과거나 미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할지 모른다. 명확하게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한국은 무언가 답답하다고 한다. 어떤 이는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며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미국은 지루한 천국이라고 한다. 답답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무엇을 하던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이때의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여유롭고 자유로운 모습이었지만, 정작 나 자신은 불안함과 답답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다시 한번 런던에 다녀와야 했다. 3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자마자 무작정 런던 행 비행기 표를 끊고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에 있는 친구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었다. 한국으로 오기 전 호기심이 생겼던 대학원 진학이나 현지 채용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근무하던 학원에도 잠시 양해를 구했고 원장님께서도 배려해 주셔서 일을 그만둘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는 정말 감사한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갈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12시간 비행을 해야 한다는 것은 같았지만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갈 이유도 없었고, 누군가의 픽업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한국보다 오히려 더 편하고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친구를 통해 단기간 머물 곳을 마련해두었기 때문에 집을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할 필요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런던에 도착함과 동시에 진짜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1년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했다. 어두컴컴하고 우울한 런던의 겨울 하늘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런던은 나에게 그런 곳이 된 듯했다.     

약 두 달을 머물면서 여유를 즐겼다. 도착과 동시에 곧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아주 조금 나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누구도 나에게 불편함과 불안함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해하는 나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주변의 모든 것이 여유로웠다. 여유는 결코 혼자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 혼자 아무리 여유롭다고 하더라도 주변이 그렇지 못하면 나 역시도 그 여유를 즐길 수 없게 된다. 런던에서 내 마음은 스스로 여유로울 수 없었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여유를 품고 있었기에, 나 역시도 자연스레 어울려 여유로울 수 있었다. 런던 어디서든 찾을 수 있는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일은 한국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너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다. 이곳은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 가벼운 농담이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되는 곳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을 어찌 다시 찾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달간 머무르며 런던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런던에서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대학원을 알아보았다. 친구들의 학교도 따라가 보고,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보며 진학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무엇보다도 비용적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들 대부분은 집에서 지원해주는 비용으로 아르바이트 없이(혹은 최소한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에 일과 학업을 병행할 필요가 없었다. 경험을 쌓기 위해 일부러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친구들에게 들은 정보와는 별개로 각 학교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대략적 학비를 검색했다. 여러 학교를 비교하자 대략적 평균 금액을 알 수 있었다. 학교마다 편차가 있기는 했지만, 1년 과정임에도 나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비용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부모님과 협상을 해보기로 했다.     

런던에서 머무르는 동안 뉴욕에 있는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뉴욕으로 놀러 오라는 초대였다. 누나는 미국 어학연수 후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의류업체에 취직했다. LA에서 근무하던 누나가 뉴욕으로 파견 근무를 하게 되어 뉴욕에 간지 약 5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누나는 뉴욕으로 오는 모든 비용을 자신이 내주겠다고 했다. 역시 누나는 누나였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덕분에 나는 어떠한 비용적 부담도 없이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으로의 여정은 생소하거나 낯설지 않았다. 이미 한국과 런던을 오갔던 경험도 있는 데다, 영어가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다. 13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JFK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생각보다 허름했다. 인천공항이 왜 그토록 찬사를 받는지 알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누나가 알려준 대로 맨해튼으로 향했다. 당시 누나는 유명 잡지사의 의류 소재(Fabric)를 담당하고 있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회사가 맨하튼에 있었다. 맨해튼,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다. 그곳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누나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 시내로 들어갔다. 지하철을 나오자마자 펼쳐진 것은 문자 그대로 '빌딩 숲'이었다. 빌딩 숲이라는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다. '빌딩 정글'이 오히려 적합하지 않을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 도시였다. 각 빌딩의 꼭대기를 보기 위해 고개를 90도로 꺾어야만 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과 삭막함을 느꼈다. 울산 촌놈이 서울에 처음 올라와 고층 빌딩을 바라보면서도 신기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 뉴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말하자면 63빌딩이 수십 채 모여있는 느낌이랄까? 런던은 극적으로 고전적인 도시이고 뉴욕은 극적으로 현대적인 도시이며 서울은 그들의 중간인 것 같다. 압도적인 빌딩 숲에 놀라긴 했지만 기대했던 만큼 머물고 싶은 도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도 '뉴욕’ 하면 살고 싶은 도시는 아니다.     

맨해튼은 계획도시인만큼 거리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도시는 바둑판과 같이 이루어져 있어서 길 이름과 거리 번호를 알면 어디든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누나의 회사가 위치한 곳은 브로드웨이 39번가였다. 바둑판식 배열로 길을 찾기가 쉽다고 하더라도 처음 뉴욕을 방문한 사람이 단번에 길을 찾아갈 정도는 아니다. 우선은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지나가던 붉은색 패딩점퍼를 입은 백인 여성에게 길을 물었다.

"Excuse me."

그녀는 내 말이 시작도 하기 전에 "No." 하고 대답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겨버렸다. 차갑기가 얼음 짝 못지않았다. 당황한 나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아마도 나를 잡상인 정도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또 다른 여성이 길을 지나갔다. 이번에는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Excuse me, how can I get to 39th of Broadway?"(저기요, 브로드웨이 39번가에 어떻게 가나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길을 걷던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한쪽 주머니에서 손을 빼 방향을 가리키며,

"That way."(저쪽이요.)

하며 지나갔다. 당황스러웠다. 런던에서 겪었던 반응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런던에 살면서 왜 런던 신사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던 나였지만, 뉴욕에 와 보니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과하다 싶은 친절을 나타내던 런던과 확연히 비교되는 일화였다.      

당황스러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한 번 더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이번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백인 남성에게 길을 물었다.

"Excuse me, how can I get to 39th of Broadway?"

남자는 나를 이상한 듯이 바라보며 내 말을 따라 했다.

"써티나인쓰 of Broadway? Oh! 떠리나인뜨 of Broadway!"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의 차이 때문일까? 그의 발음과 나의 발음은 상당히 달랐다. 아니면 나의 한국식 발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영국식 발음의 '써티나인쓰'를 미국식으로 발음하면 ‘떠리나인뜨’로 들린다. 익숙하지 않은 내 발음 때문에 그가 머뭇거렸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동양인 남자가 뉴욕 한복판에서 영국식 영어를 사용하니(정확히 말하자면 영국식은 아니지만) 이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길에서 흑인을 만났는데 그의 입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나온 상황과도 같았을 것이다. 물론 내 발음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 스스로는 무언가 차별화된 영어를 구사하는 것 같아 은근히 뿌듯했다. 영국에서 공부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인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누나의 회사를 찾아가 드디어 누나를 만났다. 당시 한국에는 도입되지 않았던 심 카드(Sim Card) 시스템을 영국과 미국에서는 일찌감치 사용하고 있었기에, 영국에서 가져온 전화기에 심 카드만 끼워 넣으면 전화를 걸고 받기가 아주 쉽고 저렴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누나에게 연락해 재회할 수 있었다. 약 2년 만에 만난 누나는 아주 멋진 뉴요커가 되어 있었다. 패션의 도시인 뉴욕에서 사는 만큼, 게다가 의류업에 종사하는 만큼, 누나는 아주 세련되면서도 귀여운 여성으로 변해있었다. 내가 본 누나의 모습 중 가장 예쁜 모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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