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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11.

반갑게 누나와 재회하고 3박 4일의 뉴욕 생활을 즐겼다. TV와 영화에서만 보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비롯해 911테러로 무너져버린 쌍둥이 빌딩, 그리고 '나 홀로 집에'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센트럴파크까지 뉴욕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한때 프렌즈라는 미국 시트콤에 흠뻑 빠져 있던 때가 있었는데, 마치 내가 그 세트장으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행하는 동안 뉴욕이 확실히 매력적인 곳이라는 데 동의하였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차갑고 삭막한 곳이었다. 빌딩은 높아 하늘을 바라보기도 힘들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저녁 늦은 시간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만 무언가 신나는 일이 벌어지는 듯했다.     

내가 느낀 이런 느낌을 정작 뉴욕에 살고 있던 누나가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뉴욕에서 처음 누나를 만났을 때 누나의 모습은 완벽에 가까웠지만, 누나의 생각은 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누나는 Homesick(향수병)을 앓고 있었다. 항상 밝은 모습으로 나를 대해주었지만, 사실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내가 다녀간 후 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 누나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미 해외에서 1년 이상 거주하면서 해외 생활이 어떠한지는 살아봐서 알 텐데, 이제 와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흘 동안 누나와 함께 지내면서 누나가 보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경험한 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타지 생활은 쉽지 않다. 익숙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설령 익숙해진다고 하더라도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몸이 아프거나 무언가 신상에 문제가 생길 때는 더구나 그렇다. 한국이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외국에서는 최소한 두세 단계는 더 거쳐야 해결된다. 일단 문제를 설명하는 것부터가 도전이니 말이다. 대사관이나 영사관 및 각종 단체가 곳곳에 있어 현지 교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는 있다지만, 실제로 해외에서 살다 보면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할 일들이 수도 없이 많다. 어떻게 매번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해외에서는 향수병을 조심해야 한다. 향수병이 내 마음대로 조절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대응으로 예방은 할 수 있다고 본다.     

누나의 경험을 토대로 분석해보면, 첫 번째로 주변에 친구가 없었다. 누나는 같이 근무하던 교포인 Amy씨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 하지만 정작 누나는 주변에 마음을 나눌만한 친구가 턱없이 적었다. 그 때문에 뉴욕이라는 도시를 늘 타지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반면 나는 런던에서 친구를 많이 만들어두었다. 운동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과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은 런던이라는 생소한 도시를 편하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향수병은 결국 외로움과의 싸움인데 나는 상대적으로 외로움을 덜 느끼고 살았다.     

두 번째 포인트는 Vision의 차이이다. 누나는 뉴욕에 살면서 더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뉴욕에서 자기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나는 어느 정도 성공에 다가간 것처럼 보였지만, 더 큰 비전이 없었기에 그곳에서의 생활이 무료해졌을 것이다. 얼마나 오래 뉴욕에 살 것이며,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에 대한 명확한 목표 의식이 부족했다. 누나의 선택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면 누나는 그곳에서 그 목표를 분명히 이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막연히 기회가 되어 혹은 다들 다녀오기 때문에 해외로 나가고자 한다면(물론 그 도전만으로도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게 되어 성장할 것이라 확신하지만) 해외에서의 생활에 지치고 힘들어 향수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향수병에 대한 궁극적 치료는 귀국이다.     

향수병에 걸리는 세 번째 이유는 언어이다. 선천적으로 언어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국어를 구사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가 모국어(Mother tongue)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엄마의 말이어서가 아니라, 본능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모국어는 엄마의 배속에서부터 들었던 언어인 만큼, 쉽고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고, 쉽게 전달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모국어를 쓸 수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불편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내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 두세 번은 더 생각해야 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이야기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해외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히 그 나라 말에 익숙해지지만, 단순히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는 불편함과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스스로 불편함이 없을 만큼 현지 언어의 실력을 늘려야 한다. 현지 언어 실력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은 이미 앞서 설명한 '노출'이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노출)를 증대시키고, 꼼꼼한 계획하에 명확한 비전을 갖추는 것이 해외 생활을 지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외국인 친구를 만드는 것을 권하고 될 수 있으면 한국인이 적은 곳으로 가라고 흔히 이야기하는데, 나는 어떤 목적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언어능력을 키우기에는 외국인 친구만 한 것이 없지만, 사실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향수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주변에 다양한 친구를 두는 것을 권한다. 또한 그렇게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의 머릿속에 비전을 각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뉴욕에서 나흘간의 휴가 동안 누나와 함께 시간을 즐겼다. 누나는 여전히 나에게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이었지만, 향수병 때문인지 누나의 말과 행동에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뉴욕이라는 세계 최고의 도시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누나가 다시 한번 대단해 보이고 부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해서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함께 살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 자신이 이미 런던에 푹 빠져 있었다. 뉴욕의 삭막함 때문에라도 서둘러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누나도 나와 같은 느낌으로 향수병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누나와 작별 후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에 도착하자 ‘집’에 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 런던에 머물 수는 없었다. 방학이 끝나면 곧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이번 방문으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어느 정도 확실해진 듯했다. 뭐가 되었건 런던에서 살아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런던에서의 취업을 1차 목표로 두었다. 취업이 되려면 런던에 있어야 했고, 런던에 머무는 동안 학생 신분을 유지하여야 하였기에 일단 추가로 어학연수를 하기로 했다. 어학연수 기간이 마칠 때쯤엔 취업이 되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고, 여차해서 취업이 안 되면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도 있었다. 물론 대학원 진학 비용의 압박이 있긴 했지만, 부모님께 한 번 더 도움을 청해볼 여지가 있었다.     

아무튼 일단은 또다시 도전이었다. 익숙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한 차례 어학연수를 마쳤기 때문에 사실 결정은 한결 쉬웠을지 모르겠다.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한 번의 낯섦에 대한 경험으로 막연하게 겁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런던에서 살기로 마음이 정해진 순간 그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처음 어학연수에서 느꼈던, 안되면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머릿속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는 Do or Die(죽느냐 사느냐)의 게임이 아니었다. Do well(잘하기)만 남았다.     

누구라도 갈림길에 서게 되면 망설이게 된다. 나약함이나 결정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그 결정으로 인해 야기될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찰나의 결정으로 인해 큰 변화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생은 게임 속 상황과는 달리 한번 결정을 내리면 되돌릴 수가 없다. 더구나 그 결정에 스스로 책임도 져야 한다. 누군가의 말대로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크게 변하기도 하고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결혼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지금껏 해왔던 결정을 돌이켜 생각해보자. 물론 몇몇 결정은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를 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결정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결정은 당신이 걱정한 만큼 심각한 결론을 초래하지 않는다. 특히나 예상되는 이익과 손해가 비슷해서 그 결정을 내리기가 아주 힘든 경우라면 더구나 그렇다.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큰 차이를 가지고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일단 결정을 내리면 뒤를 돌아보거나 그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부터 당신은 Do well만을 생각해도 모자랄 만큼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사실 런던에서 살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불확실함뿐인 모험이었지만, 일단 결정을 내린 순간 그 결정은 나에게 있어 아주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제는 잘하는 일만 남았다.

당신이 만약 어학연수나 유학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무엇이 당신을 고민하게 만드는지 먼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금전적 부담일 수도 있고,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일 수도 있다. 혹은 세 가지 모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당신을 고민하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자. 그리고 그 부담에서 벗어날 방법도 찾아보자. 금전적으로 부담이 된다고 하면 지금 당장 일자리를 구해 돈을 모으자. 가고 싶은 국가를 선택할 때 일을 할 수 있는 나라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의외로 학생 신분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적지 않게 있다. 가까운 일본부터 멀리 호주나 뉴질랜드까지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국가들이 많다. 정부와 민간단체에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그램으로 해외 유학을 지원받을 기회도 있으니 이 또한 찾아보길 권한다.     

언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망설이고 있다면 나는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한다. '일단 가라.' 수년 전 친한 친구를 영국으로 보냈다. 영어를 전혀 못 하던 친구였기에 어학연수나 유학 자체가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런던에 처음 도착해 걸려온 전화로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아 난색을 보이던 그 친구도 지금은 뉴캐슬 대학원을 졸업한 후 국내 최고 기업인 S 사의 터키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일단 가보자. 한국에서 그 나라의 언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망설이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그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위의 두 가지는 그나마 쉬운 편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일지 모른다. 당신의 나이가 얼마가 되었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루어낸 익숙함이 있다. 사람, 돈, 배경, 학벌 등의 익숙한 것들에게 이별을 고해야 한다. 해외에 나가면 그런 것들은 모두 필요가 없다. 전혀 모르는 사람, 전혀 모르는 공간, 전혀 모르는 환경과 마주치려면 두려움이 앞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이 이루어놓은 익숙한 것들은 쉽게 당신을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당신이 1년 정도 친구들 곁을 떠난다고 해도 주위 사람들이 당신을 영영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주위의 사람들이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 돌아왔을 때 더욱 당신의 소중함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포기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더 다양한 익숙한 것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뚜렷한 목표가 있고, 갈 수 있는 제반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계기가 어찌 되었건 당신이 도전을 시작한 그 자체만으로 이미 보상받고 있다. 아무런 계획도 없었던, 막무가내식인 나의 어학연수가 결국은 나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준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가고, 어떻게 살지에 대한 ‘How to’는 결국 새로운 비전을 준비하기 위한 준비운동인 셈이었다. 런던에서의 도전을 통해 얻은 새로운 목표들로 내 인생은 이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무언가 변화의 시점에 서 있는 당신이라면, 비록 꼼꼼하게,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단 길을 떠나 보길 바란다. 이야기 속 많은 주인공이 뜻하지 않게 길을 떠나게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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