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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12.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런던 행을 준비했다. 4학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졸업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런던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대학은 졸업해야 다른 기회도 생기기 때문이다. 학교생활은 여전히 신선할 것이 없었다. 4학년이 되자 후배 녀석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했다. 당연히 학교생활이 재미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학교를 빨리 끝내고 런던으로 가고 싶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런던에 갈 수 있을 법한 여러 가지 경로를 찾아보았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살펴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대부분 단기 연수 정도였고, 해외 취업을 지원하는 곳은 대부분 전문직을 우대해 주었다. 지역에서 열리는 취업 박람회를 이곳저곳 다녀보기도 했지만 아무 보증도 되어있지 않은 나를 어느 누가 선뜻 영국으로 가서 일해보라고 보내 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별 소득이 없었다.     

상황은 여의치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런던으로 향해 있었다. 편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4학년이 되면 학교 수업보다는 취업이 우선이어서 교수님들도 학교 수업에 반드시 출석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일단 런던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현지 취업을 하게 되었다는 핑계로 2학기를 건너뛰기로 했다. 사실 수업을 한 학기 더 듣는다고 해서 큰 배움이 있지는 않겠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학기가 마칠 무렵부터 주임교수님들을 찾아가 운을 띄웠다.

"영국에 알던 업체가 있어서 취업이 될 것 같습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바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사실 지난겨울 런던에 다녀올 때도 교수님들의 배려로 몇몇 과목의 정규 시험 일정보다 앞당겨 시험을 치를 수 있었기에 이번에도 교수님들께서 융통성을 발휘해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마침 졸업을 위한 학점도 거의 다 채워두었기 때문에 마지막 학기는 3개의 과목만 들으면 졸업이 가능했고, 3과목 모두 담임 교수님들의 전공 수업이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담임 교수님들께서는 내 도전을 지원해 주셨다. 혼자 해외에서 어려운 상황이 많을 것이니 힘을 내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시기까지 했다.     

운은 띄워졌으니 이제 진짜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은 비자부터 해결하자. 영국은 생각보다 비자 발급이 까다로워 이미 한 번 학생비자를 받은 사람에게 또다시 학생비자를 주지 않는다. 미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미 어학연수를 마친 사람이 다시 학생비자를 신청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일이 다반사이다. 불법체류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번 받은 공식적 학생 비자가 1년이 아닌 6개월로 짧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IELTS 점수가 5.5점으로 낮아 추가 어학연수에 대한 명분이 있었다. 런던에서 알아 온 가격이 가장 저렴한 어학원에 등록한 후 스쿨레터를 발급받아 비자를 신청했다. 첫 번째 어학연수보다는 금액도 거의 절반 이하의 수준이었고 기간도 1년으로 훨씬 길었다. 아무래도 모든 준비를 혼자 하다 보니 번거로움이 많기는 했지만, 이 또한 나름대로 경험이 되었다. 큰 무리 없이 비자가 발급되었고, 이제 진짜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사실 일자리가 구해지는 것과 상관없이 런던에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일단 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우선은 경우의 수를 넓히기로 했다.

영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인터넷 웹사이트가 있다. 04uk라는 웹사이트인데, 벼룩시장, 구인·구직 등 다양한 정보가 공유되고 있는 교민들을 위한 사이트였다. 현지 업체들의 지리적 조건이나 근무 환경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 서칭으로도 충분히 지원하고자 하는 회사를 추려낼 수 있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일정 부분 규모가 있는 곳을 위주로 몇 군데를 정해서 이메일을 보냈다. 그러던 와중에 TV에서 우연히 런던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신생 물류회사인 A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는데, A사는 중소 스타트업 기업으로 런던에서 나름대로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는 기업이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A사의 런던 진출 초기부터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들이 펼쳐온 신화적인 영업활동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A사의 채용공고를 04uk에서 본 것이 생각난 나는 바로 이메일을 보내 지원 의사를 밝혔고 A사는 답신을 보내와서 인터뷰에 응하라고 하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머릿속에서는 런던으로 가서 A사에 취업해 5년의 경력을 쌓은 후 영주권을 받는 완벽한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었다.     

A사의 제안을 바탕으로 교수님들과의 협의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런던으로 갈 준비에 들어갔다. 지난번 여행으로 경비도 많이 사용했거니와 언제 보게 될지 모르는 친구들과 술도 한 잔씩 기울이고 나니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는 내 런던 행 결정에 ‘무슨 돈으로 갈 거냐?’며 걱정을 하셨지만, 나에겐 최후의 보루가 있었다. 바로 오토바이였다. 나름 애지중지하던 오토바이였지만 대의를 위해서 희생해야 할 순간이 왔다. 마치 김유신 장군이 말목을 자르듯, 나는 런던 행의 굳은 의지를 다지기 위해 오토바이를 팔고 그 돈으로 런던 행 티켓을 마련했다. 학원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으로 당분간의 생활비를 충당하기로 하고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애마를 팔아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굳은 결심이었고 실패하고 돌아오지 않겠다는 배수의 진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약 5개월 만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게 되자 집부터 해결해야 했다. 이번에는 하이스트릿(번화가) 근처의 집을 구해 다른 유학생들과 방을 쉐어하기로 했다. 이렇게 집을 쉐어하게 되면 다소 신경이 쓰이는 일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비용면에서 훨씬 절감된다. 일을 시작하게 되면 여유가 생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아껴야 할 상황이었다.     

집을 렌트하고 방을 쉐어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번거로웠다. 다행히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은행 계좌와 SI Number(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사회보험 번호)로 세금 관련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채워 넣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공고를 올려서 쉐어할 사람을 구하면 되지만, 매월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이 있는 반면, 잠시라도 사람이 구해지지 않아 방을 놀리게 되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상당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방이 비어있지 않게 유지하는 것과 렌트한 집의 유지 관리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한국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방을 채웠지만, 때에 따라서는 외국인을 받아야 할 때도 있었다. 생활방식이 우리와 다른 외국인과 함께 지내는 것은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비록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가 많고 신경 쓸 것이 많았지만 확실히 렌트를 하면서 비용적으로는 많은 이득을 보게 되었다.     

A사와의 예정된 인터뷰를 위해 회사로 찾아갔다. A사는 런던 외곽에 있어 교통편이 좋지 않았다. 물류회사의 특성상 차고지와 창고를 가지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임대료가 저렴한 곳에 자리한 듯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 담당자를 기다렸다. 역량 있는 회사라는 평을 받고 있었기에 내심 기대가 되었다. 잠시 후 인터뷰를 보기 위해 담당자가 왔는데, 다름 아닌 A사의 대표이사였다. 그가 자신을 소개할 때 이미 TV에서 본 그의 얼굴을 내가 먼저 알아보았다. 면접이 진행되고 그는 내 이력서를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일반적 신상에 대한 질문을 던진 후에 그는 A사와 이곳의 환경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일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생각한 미래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이쪽 일이 상당히 터프하다는 건 알고 있나요?"

사실 물류회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콜벤을 운영하실 때 잠시 도와준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설명한 물류회사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16시간 이상 일을 해야 하고 특히나 중소기업이었기 때문에 여러 분야의 일을 모두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정해진 퇴근 시간도 없다고 했다.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각오를 한 상황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지금 비자가 학생비자네요. 학생비자가 끝나면 비자는 어떻게 할 거예요?"

"가능하면 취업비자를 받고 싶습니다."

나의 말에 대표는 난색을 보였다.

"취업비자를 받으려면 사실 회사에서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이건 내가 장담을 하지는 못하겠는데. 우리가 현지 채용을 할 때는 대부분 영주권자나 워크퍼밋(취업허가증)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요."

취업비자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내가 정말 열심히 해서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겠지만, 현지에서는 영주권자나 워크퍼밋을 소유한 사람을 채용해야 비자에 대한 비용적 부담이 없다. 그들로서는 당연히 나를 고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번 잘 생각해보고, 그래도 일단 도전해보겠다고 하면 다시 오세요. 일은 시켜드릴 수 있어요."

그의 말을 듣고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가 복잡했다. 고민이 되었다. 취업비자가 담보되지 않는 회사에 계획대로 취업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하루 16시간 동안 근무하는 것도 겁이 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후에 비자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혼란이 왔다. 그러고 보면, 대표는 나에게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다. 일하는 시간에 비하면 월급이 많지도 않았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대학원을 준비하는 것이 더 수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내 커리어가 물류회사로 굳어지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듯하다.     

결국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자리에 대한 공고는 많지만, 대부분은 식당 종업원이나 단기 아르바이트였기 때문에 정규직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몇몇 업체에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조차 드물었다. 그러던 중 한 업체의 공고를 보았다. 해외에는 나라마다 교민들로 구성된 한인회가 존재한다. 영국에도 재영한인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마침 인터넷에서 직원을 구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어떤 일을 하는지, 보수가 얼마나 되는지 등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지만, 사기업이 아닌 공기업의 느낌이어서 우선은 지원했고 곧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면접 장소는 한인회관이었는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자신을 한인회 실장이라고 소개한 면접관은 알고 보니 현재 한인회장의 아들이었다. 실장은 근무 조건과 하는 일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마음이 확 끌릴만한 그런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 사무직이라는 점과 근무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 때문에 일을 해보기로 했다. 당장은 이 일이 아니면 먹고살기도 막막해 보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영국에서의 취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영국에서의 생활도, 계획도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했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교수님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되었고, 화려할 것 같았던 나의 런더너 생활도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내 도전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건 런던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적어도 생활비는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나에겐 학생비자로 1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1년 동안 일이 어떻게 풀리는지 지켜보고 그 이후의 일은 내가 만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젊고 잃을 것이 없었다. 런던에서의 생활 자체가 나에게는 배움이었고 도전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처음 계획했던, 혹은 처음 예상했던 그 길은 아닐지라도 결국 나를 돌이켜보면 목표로 한 대부분은 이룬 셈이다. 만약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 목표에 대한 나 자신의 확신이 모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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