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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정 Feb 16. 2023

2화. 경이로운 봄 눈밭에서 겨울은 죽고

제3부. 기다리는 여심, 환생

  눈을 뜬다. 낯이 시리다. 문풍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불 밖으로 드러난 얼굴과 어깨를 후리고 간다. 해질 무렵 서운이가 아궁이 깊은 곳까지 넣어두고 간 장작이 마지막까지 제 몸을 다 태우고 사그라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화르르 오그라지며 타오르는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고 부스러질 듯 바싹 마른 솔가리를 듬뿍듬뿍 넣어 불땀을 좋게 하고는 감나무 잘라낸 가지와 뽕나무 웃자란 가지들을 넣어 주황빛 불꽃들이 너울거리게 했다. 그리고는 방가 태식이 놈이 도끼를 휘둘러 패 놓은 장작을 여덟 팔자 모양으로 벌려 넣고 사이사이로 잔가지들을 넣어 불을 지폈다. 탁, 탁 잔가지들 타오르면서 부러지는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지며 아궁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툭, 툭 잘 마른 장작의 속살들이 두꺼운 껍질 속에서 발라지며 부러지는 소리가 저희들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어쩌면 그리도 어여쁜가. 눈 내린 겨울밤 툇마루 시렁 위에 얹어 둔 석짝의 뚜껑을 열고 꺼내온 홍시의 속살처럼 붉고, 깊어가는 가을 우물가 두레박에 떨어진 내장산 애기단풍처럼 붉은 것이 자식을 품은 어미의 심장으로 치마폭 겹겹 알알이 붉은 석류의 꽃잎으로 너울거린다. 그 불꽃이 얼굴을 뜨겁게 달구고 뛰는 심장은 차갑게 식히더니, 쭈그리고 앉은 정강이는 복사뼈가 시리도록 이글거렸다.

  만물을 충실하게 하되 발동시키지 아니한 달이라는 뜻으로 창월(暢月)이라 부르는 동짓달은……. 빙점이다. 수천 수백만의 결로 이루어진 물의 알갱이들이 모여들어 이루는 결정체들은 계절 따라 다르고, 놓이는 곳에 따라 다르다. 꽁꽁 얼어붙은 땅의 흙을 헤집고 나와 피어난 꽃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저마다의 표정을 짓게 하는 봄날의 물은 수백수천의 몸으로 만나 한 송이 꽃잎으로 피어난다. 오밀조밀하게 모여든 낱낱의 결들이 이루는 하모니는 대설과 소한 사이에 들어 밤이 가장 긴 날, 자정의 달이 가장 높은 곳에 떠올라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새벽은 끝끝내 올 것 같지 않는 동지(冬至), 호한(冱寒)의 절정, 그 밤을 뚫고 나와 새롭게 부활하는 생의 충동으로 피어나는 꽃이다. 드디어 도달한 겨울의 고지, 그곳에서 새롭게 맞는 태양의 훈풍, 흘러가는 물도 아름다운 결정체로 탄생하는 계절, 그것은 극에서 만난 극의 협치였다.

  아세(亞歲)라고도 부른다. 작은설이라 부른다.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새롭게 펼쳐질 날들이 빼곡하게 적힌 달력을 선물하며 새날의 행운을 기원하는 날의 절정은 똬리를 틀고 깊이 잠든 구렁이의 글자 사(蛇)를 뒤집어 붙이는 날 밤의 꼭대기에서 길을 나선다. 바로 맞은편에 있을지도 모르는 맹서(猛暑)의 절정을 향해 걸음을 뗀다. 물은 목화솜을 두툼하게 넣어 만든 버선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에게 선물하던 동지헌말(冬至獻襪)의 날 바쁘게 움직이는 며느리의 시린 발목을 흘러서 또 하나의 결정체를 찾아 떠난다.

  망종과 소서 사이에서 물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 창월(暢月), 그 화창한 달의 기운이 하지까지 가는 길목에서 기운이 쇠했나? 풋보리 베어다 그을음을 해 먹는 사람들의 들판에서 다리 쉼을 한다. 벼나 보리처럼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리는 태인(泰仁) 사람들의 주린 창자가 절로 불러오는 배고픈 들녘에서 ‘밭보리는 망종 전에 베고 논에는 서둘러 벼를 심으라.’ 던 옛 선인(先人)의 월령가를 듣는다. 맥추(麥秋)를 재촉하는 남풍이 불어오면 누른빛 창연한 들녘에서 타맥장(打麥扙)을 놓자는 선인의 붓끝은 어쩌면 그리도 섬세하고 세밀한가. 섭섭지 않게 조곤조곤 다져가며 훈(訓)을 둔다.

  잠농(蠶農)을 마칠 때에는 사나이의 힘을 빌어 누에섶을 만들고 고치나무도 장만하라고 이른다. 고치를 따고는 청명한 날을 가리어서 발 위에 엷게 펴고는 폭양(曝陽)에 말리라 한다. 쌀고치 무리고치 누른 고치 흰 고치 색색이 분별하여 자애를 차려놓고 왕채에 올리면 빙설 같은 실이 감긴다고 말한다. 그것을 사랑홉다 자애소리 금슬(琴瑟) 고르는 듯하니 부녀들 적공 들여 이 재미 보는구나. 탄복이 쏟아진다.


  물이 일어선다. 용솟음치던 심장에 깊은 우물을 만들고 맹서의 절정 하지로 들어선다. 햇감자 거두고 햇마늘 거두어들이는 사람들, 그들의 마루에서 포슬포슬 김이 오르는 감자를 본다. 둘러앉은 사람들 흙기미 눌러앉은 감자의 껍질을 벗기며 소금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고, 우물에서 건져낸 열무김치 돌돌 말아 입 안으로 몰아넣는 모습을 본다. 늙은 사람은 껍질도 아까운 모양이다. 괭이 박힌 두터운 손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우걱우걱 씹는다. 도란도란 들려오는 말소리에 한 각의 모서리 꽃뿔이 돋고, 먼지 앉은 마루에 퇴침을 놓고 누운 중노인의 코 고는 소리에 한 각의 모서리는 꽃뿔을 돋운다.

  낮이 가장 긴 날, 정오의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며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날, 밤에도 지지 않는 태양으로 대낮같이 환한 백야가 지속될 것 같은 하지(夏至), 그 절정의 꼭대기에서 호미를 들고 나서는 아낙의 뒷모습을 보며 한 각의 꽃뿔이 피어난다. 여섯 개의 각이 저마다의 꽃뿔로 피어나는 계절, 용솟음치던 심장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은 주전자에 담겨 작은 계집아이와 함께 아낙의 밭으로 간다. 수건을 벗으며 인정머리 없는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는 아낙의 손에는 우두둑 뿌리째 뽑히는 풀들의 아우성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다.

  물이 꽁꽁 어는점에서 얼음이 사르르 녹는점……. 빙점, 그것은 극에서 만난 극이 펼치는 삶의 향연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장작의 불꽃이 마지막 혼으로 일어서는 불잉걸의 꽃불 지짐 되어 스러지는 것을 목도하고도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은자리에서 떠나올 줄 모르던 소희의 초저녁은 아직도 밤이다. 낯이 시린 밤이다.

     

  웬수 놈의 밤은 길어 무시로 깨는 잠, 꿈은 질서가 없다. 부끄러움조차 잃었는가. 사북의 자리에 앉아 있다. 무엇인가. 사람의 형상이 아니다. 분명 거울 속에서 본 내가 분명한데 어찌 나비가 되었는가. 본디 나는 이곳에 있는데, 또 하나의 나는 저곳에 앉아 있다. 내가 죽은 것인가. 아니다. 분명 나는 이곳에서 사북 위에 살포시 앉은 나비를 보고 있단 말이다. 차라리 좋다. 모든 굴레 다 벗어버리고 한 마리 나비나 되어 어디로든 날아가 가버리지. 끊임없이 생겨나는 상념과 번뇌, 그것들이 또 하나의 멍에가 되어 칭칭 감아 옭아매면 그것은 또 굳어서 껍데기에 껍데기를 더하는 것일 뿐, 차라리 한 마리 나비나 되어 천년바위 먹빛으로 넝쿨진 난초 꽃잎에나 안겨야지. 꽃모가지 불쑥 솟아 진분홍 곱게 물린 노란 꽃잎에 서부렁섭적 올라앉으면 새의 소리로 퍼지는 합죽선 물결 따라 그림자 서생의 지향점에서 별이 되지 않겠는가.

  잠이 들었던가. 입 안이 텁텁하다. 맞물린 이빨 사이에 머무는 혀끝은 서늘하다. 살짝 들린 사이에서 꿈틀거리며 감각을 되찾아가는 혀가 입천장 가운데로 간다. 맞닿는 옴팍한 곳을 쓸다가 꽉 물어 침을 삼키고는 아랫니 움푹 파인 곳으로 내려간다. 우둘우둘 보들보들 혀밑샘 불룩한 것을 간질여본다. 말랑말랑하게 만져지는 느낌이 좋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다. 혀를 내밀어 침을 묻힌다. 까슬까슬한 각질이 도르르 말린다. 냄새가 난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불을 마저 젖히고 자리끼 사발에 손을 뻗는다. 차갑게 밀려드는 사기그릇을 들고 물을 마신다. 비릿하다. 속이 메슥거린다. 갑갑하다. 무릎걸음으로 기어간다. 방문을 연다.


  아, 아, 아…….


  눈이 내렸다. 온 천지에 소복이 쌓인 눈 위로 눈이 내린다. 한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간다. 코끝이 아리다. 순간 눈물이 오른다. 소리도 없이 내린 눈이 봄을 맞는다. 입춘이라 건양다경 입춘첩 대문에 붙기도 전에 눈이 내린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경이로운 봄, 겨울은 죽었다.

  겨울이 죽은 마당으로 내려선다. 눈비늘 쓰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눈이의 굳건한 침묵이 하르르하르르 쌓이며 피어나는 눈꽃에 물든다. 달이 숨은 밤이어도 세상은 밝다. 온통 푸르게 뒤덮던 넝쿨의 잎사귀들이 사그라진 자리에 추억이 돋고, 굳게 닫힌 사당의 솟을대문 너머 새들이 내려앉던 계단에도 눈이 쌓였다. 소희의 발걸음 흔적을 쪼아 먹은 자리에서 바람이 인다. 비늘이 돋는다. 하얀 터럭의 비늘, 눈부시게 흩날리는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선다. 손가락 문양이 점점이 찍힌 갓 위로 눈꽃이 날린다.

  소희의 발걸음이 떼어지는 사이 그림자가 바투 다가선다. 이윽히 내려다보는 얼굴, 고요한 얼굴이 소희의 놀란 눈을 들여다본다. 팔을 들어 감싸 안는다. 홍화물 곱게 먹은 도포의 넓은 소맷자락이 소희의 어깨 날갯죽지를 감싸 안는다. 올려다보려는 소희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춘다. 심장이 뛴다. 소희의 심장 한 뼘 위에서 도포의 심장이 고동친다. 메아리친다. 이슬이 맺힌 눈동자에 눈을 맞추고, 오뚝 솟은 콧등에 입술을 둔다. 차갑게 속삭이는 입술이 소희의 입술에 포개진다. 첫날밤의 기억이 없는 두 사람, 경이로운 봄 눈밭에서 겨울을 죽인다. 명주실 강 뜨겁게 펼쳐지던 여름의 마당에서 칠월칠석 빗물에 젖던 직녀 소희에게 도영은 등이 없는 사람, 속살을 바람에 파 먹힌 채 팔 벌리고 선 사람의 서글픈 모습만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것이 못내 서러워 눈 내린 겨울 봄으로 온 사람, 그의 도포 소맷자락에 싸여 발을 옮긴다. 점점이 찍힌 작은 발, 가지런한 길에 눈이 쌓이고, 오래된 느티나무 두툼한 팽나무와 어깨를 겨루는 동산으로 올라선다.


  사북의 자리는 저만치 내려앉은 정자, 내딛는 계단이 끝나는 자리, 그곳에 소희를 앉히고 부채를 모두어 잡은 도포자락이 넓게 펼쳐지는 합죽선의 마당에 선다. 태인 사람들 깊이 잠든 밤, 상연지(上蓮池) 넓은 밭에 시들어 누운 연꽃 줄기들 외로움에 지쳐 고독한 밤, 어디선가 시나위 구슬픈 가락이 사무치게 들려온다. 느린 진양조 버티며 올라서는 거문고 줄 소리가 떠덩 덩 떵~ 장구 소리에 안겨들며 울음을 운다. 홍화물 오련하게 묻어나는 연꽃 동산에 그림자 서생의 버선발이 태사혜 밖에서 시나위 가락을 탄다. 빙그르르 돌며 펼쳐든 부채 팔일(八佾) 언덕에 두둥실 솟고 비스듬히 내려간 오른팔 꺾어 돌며 우수에 젖은 눈망울 짙은 눈썹 아래 가두며 애써 웃음을 짓는다. 챙 넓은 갓이 반듯하게 섰다가 살짝 비끼는 사이로 드러난 얼굴선의 윤곽이 소희의 가슴에 새겨진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가 둥근 관자 아래서 음영 짙게 드러난다. 참으로 정갈하다. 손가락으로 더듬어 만져보고 싶다. 유혹이 인다. 부드러운 곡선이 말없이 만져지는 밤, 빙그르르 돌며 수평을 이룬 두 팔이 우르르 달려 물결을 이루고 바람에 날리는 넓은 소맷자락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쓸리는 찰나 그림자 서생은 힘차게 도약하는 한 마리 새가 된다. 춤이라는 것이 매양 이러한 것인가. 바람에 날리는 터럭, 힘차게 비상하는 새, 두고 떠나는 홍심(紅心), 진정 춤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추지나 말 것을 기어이 찾아와 추면서 붙잡아두는 것은 무슨 심사인가.

  굿거리 마당으로 올라선 팔일의 언덕에서 오른발 힘차게 디뎌 합죽선 활짝 펼치고 곧게 서더니 왼발 뒤꿈치를 들어 바짝 올린 채 오금을 접었다 펴며 돌아간다. 그림자 서생의 사북이 물오른 모퉁이 겨드랑이 골에 선다. 땅에 붙어 떨어질 수 없는 미련인 양 능선 따라 구불거리던 합죽선 하얀 물결이 속살거리며 퍼지는 쾌자자락의 너울에 실려 붕어배래기 연못의 물결을 차고 나온다. 푹 고꾸라질 듯 곧게 서고 어깨 추어올리며 푹 고꾸라질 듯 일어서는 무릎 안쪽의  오금팽이가 잔뜩 부풀어 오른 개구리울음주머니마냥 태인 사람 잠든 지붕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들판 겨울 보리순 고개 쳐드는 소리로 퍼지는 대금소리에 젖는다.

  ‘어허 좋다~ 조옿다~’ 힘을 넣어 움츠렸다 펼치며 터트리는 수장구 고수 놈의 추임새는 겹으로 묶어둔 보따리를 풀어 밤의 장막을 거두려는 듯 힘차게 퍼지고, 손톱의 날을 세워 꽉 조여 문 매듭을 풀려 꽁꽁 힘을 쓰는 대금은 휩쓸려오다 박차고 오르며 스러지는 물의 살들을 보듬고 퍼진다. 대나무 뿌리 속살을 모조리 파내고 양 옆 툭 터진 곳 한쪽을 오동나무 얇게 저민 판으로 막은 해금이 명주실 두 가닥으로 스러지는 대금의 소리를 옹위하는 밤의 골짜기, 그곳에 갓밝이 물 힘차게 몰아넣는 서생의 합죽선이 화사하게 펴진다. 커다란 날갯죽지 활짝 펴고 움쑥 움쑥 날갯짓하며 광활한 창공으로 솟아오르려는 몸짓, 젖은 미소, 절정의 눈짓, 그 모습에 취하는 소희, 내리던 눈조차 그치고 쌀뜨물처럼 밝아오는 아침……. 연못 속 붕어들도 숨어 잠든 겨울 죽은 봄, 사북의 자리에 앉아 있던 나비 한 마리, 너울너울 춤추는 소맷자락에 안겨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경이로운 봄, 소희의 발걸음 흔적을 쪼아 먹던 자리로 돌아간다.      



*사진: 백경우(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및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선생님의 <한량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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