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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미고 Jan 20. 2022

권위에 의존하는 차별의 잔혹성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취미발레를 하고 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어 발들인 취미라 힘에 부치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속 하다 보니 n년차 취미리나가 되었다. 취미발레 카페는 내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몇 안 되는 온라인 커뮤니티 중 하나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진 않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새로 올라온 장비 중고거래 게시물에 살까 말까 내적 고심을 하기도 하고 최신 발레 공연정보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전 국립발레단에서 올린 <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가 커뮤니티 안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보고 있기 불쾌한 장면이 있다. 레퍼토리가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다. 말괄량이를 길들이다. 가만보면 제목 그 자체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말괄량이라 정의 내린 기질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해 길을 들인다는 거지.


원작은 알다시피 세익스피어의 고전 희극이다. 천방지축이라 아무도 결혼하지 않으려는 말괄량이를 신부로 맞아 밥을 굶기고 가스라이팅해서 요조숙녀로 만들어 모두가 부러워하게 된다는 결말이다. 극중에서 특히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하인들을 시켜 말괄량이를 괴롭히는 장면인데 이때 하인들이 뇌성마비나 뇌병변환자 등 지체 장애인의 흉내를 낸다. 안무가가 코믹한 요소를 위해 넣은 장면이라고 하지만 과하다. 그렇게 커진 논란은 결국 발달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가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정을 넣고 안무를 수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누군가는 불편한 장면이 있지만 원작이 그런 걸 어떡하겠느냐. 그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스토리라 생각하며 감수하고 본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문호의 고전(classic)인데, 고전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평가되는 예술작품’인데 이걸 보기 불편하다고 수정하는 게 맞는가. 고전에 대한 도전이 아닌가. 이게 내 머릿속에 처음 든 생각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권위에 지독히 의존하는 타입이었던가 보다. 극을 올릴 당시에는 분명 관객들이 깔깔거리고 빵 터질 킬링포인트로 야심 차게 집어 넣은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그 장면에서 웃어야 하는가. 아니 웃을 수 있는가.


이 작품은 코믹한 희극이라는데 현대기준으로 스토리라인만 놓고 보면 이런 비극이 또 없다. 배우자에게 학대당해 원래의 천성을 잃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며 칭찬받는 삶은 누구를 위한 해피엔딩인가. 작품자체에 거부감 들고 보기 불쾌하다 한 이들은 이 찝찝한 엔딩에 돈 주고 박수 치며 겪는 인지부조화가 혼란스러운, 말괄량이에 감정이입 된 관객들일 테다.


지체장애인을 흉내내는 안무에도 더 이상 웃지 않는 관객들이 많아졌다. 누군가를 비하해서 유도하는 웃음이 즐겁지 않고 불편하다 말한다. 웃기려고 했다는 창작자의 의도에 더 이상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관객들이 생겨날 때 변화가 일어났다. 시간을 관통하는 가치를 지녔다는 클래식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각색되고 변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으면서 특히 유머라는 도구로 가벼이 여겨질 수 있는 차별의 잔혹성에 대한 지적이 인상깊었다. 웃기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가. 나는 정신지체장애를 희화화 한 개그를 보고 아무 생각없이 웃고 흉내내지 않았는가. 이 개그를 보고 웃지 못하는 누군가를 밟고 서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나는 약자와 소수자를 비하하는 개그에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그 차별이 무비판적으로 지속 될 수 있게 힘을 실어주고 있지 않았던가.


많은 차별의 행태들은 과거로부터 지속된 관행에 의존하고 있으며  관행이란 무소불위의 권력과 같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기독교에서 내새우는 성경의 교리. 남녀차별의 근거로 이슬람교에서 신봉하는 코란. 책에서는 우리가 정의라 믿고 따르는 법률도 차별을 묵인하고 조장하는 근거로 작용할  있다한다. 하물며 서로의 교조로 내세우는 성경과 코란의 뿌리는 같다.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모두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이지만 다른 해석으로 서로  흘리며 전쟁한다.


오랜 시간 이어 내려온 규범을 다 전복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권위를 생각없이 신봉하고 만고불변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신화에 젖어 있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차별의 도그마에 동참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고 토론할 때 새로운 변곡점이 시작된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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