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나는 매일 같은 양말을 신고 있는데 이는 남편의 양말을 신는 까닭이다. 결혼 전 남편은 하루 양말 빨아 신을 정신조차 없었는지 매일 퇴근 후 집 앞 다이소에서 양말을 한 켤레 씩 사 신었는데 다 하나같이 똑같은 회색 양말이다. 빨지는 않고 새로 사신기만 하다 보니 감당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른 듯한데, 한 번은 남편이 혼자 자취하는 집에 갔을 때 백 켤레가 넘는 양말이 빨래 건조대 위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아 동태처럼 바짝 말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결혼 전 여동생과 함께 살던 시절 자매는 속옷은 구분해 입어도 양말은 손에 짚이는 대로 신는 공용재산이었는데, 동생의 취향 덕에 나는 화려한 양말을 신고 다녔다. 호피, 꽃무늬, 형광 색, 페이즐리, 망사, 레이스.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매일 특이한 양말을 신고 다니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건 대체 어디서 구해서 신느냐. 나도 좀 사다 달라 부탁을 받기도 했다.
남성용 신사양말은 열풍 건조기에 들어갔다 나오니 적당히 줄어들어 여자 발에 신기에도 무난하다. 헤진 곳 하나 없이 발목도 아직 짱짱하니 갖다 버릴 수도 없다. 나는 열심히 남편의 양말을 신지만 이 지겨운 회색 양말은 꽤 품질이 좋은 편인지 어째 한 켤레 빵꾸내 먹기가 쉽지 않다.
오늘은 매일같이 신는 회색 양말 위에 새로 산 향수를 뿌리고 싶었다. 서촌에 세련된 디스플레이의 스튜디오에서 산 스테이폴리오 향수는 베이스 노트인 시더우드가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향이었다. 나는 보통 병원 가는 날은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남자에게도 어울리는 중성적인 향이라 당신이 뿌릴래 남편에게 묻자 기껏 사놓고 왜 쓰지 않느냐 타박한다.
"난 보통 발목에 향수를 뿌리는데 진료받을 때 의사 선생님은 내 발목을 바로 옆에 두고 초음파 검진을 하거든. 난 그 일분도 안 되는 시간을 위해 1-2시간을 대기해서 기다리는데, 내 향수 냄새가 의사 선생님 정신을 딴 데 환기시킬까 봐 그게 걱정돼."
남편은 그 얘길 듣고 의외라는 듯이 '그건 참..사려 깊은 생각이네.' 한마디 한다. 뭘 그런 걸 다 신경 쓰느냐 핀잔을 줬으면 한바탕 짜증을 쏟아낼 판이었는데 잠자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웠다.
병원에 갈 때도 나는 회색 양말을 신는다. 향수 냄새와 같은 이유로 형형색색 화려한 양말을 신어 진료하는 의사의 정신을 조금도 딴 데로 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진료실에 가면 굴욕 의자란 것에 앉는데 양다리를 벌리고 앉아 아랫도리를 하얗게 내놓고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된다. 이때는 나를 다 내려놓는 심정이 되는데 마치 세상에 나와 양말만 남은 기분이다. 그 순간 양말은 나의 정체성이 된다. 분간하기 힘든 흑백의 초음파 화면으로 진료하는 그 짧은 시간. 컬러풀한 시선 강탈 양말로 잠깐의 눈길도 할애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병원 갈 때 내 정체성을 회색 양말에 한정시키기로 했다.
실상 병원엔 명품가방을 메고 오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내 기준 결혼식에나 매고 갈 으리으리한 브랜드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어쩌면 온갖 산전수전 볼꼴 못 볼꼴 다 보고 겪었을 의사 선생님의 집중력을 내가 과소평가해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난임 병원에 다니는 것을 아는 지인들은 힘들지 않으냐 묻는다. 나는 그저 정기적으로 피를 뽑고 스스로 주사를 놓고 시키는 대로 시술대에 앉고 사놓은 향수를 묵히고 무난한 회색 양말을 신는. 그 정도 노력을 하고 있다. 하라는 대로 하고 기다리는 것 외에 그 정도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내 옷장에 잠자고 있는 화려한 양말을 개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