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서 르네상스까지
바뇨레죠를 떠난 버스는 눈부신 초록의 들판과 올리브 숲을 지나 움브리아 평원을 달렸다. 아직 파종을 하지 않은 붉은 흙도 보였다. 붉은 황토 빛이 아주 건강하고 비옥한 땅이다. 마침내 아시시가 나타났다. 멀리 거대한 성채 같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언덕 위의 아름다운 도시 아시시를 압도하는 광경이다.
성문 안으로는 큰 차가 들어갈 수 없어 우리는 성문 앞 광장에서 차를 내려 호텔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저녁의 기분 좋은 산책이었다. 아시시의 언덕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는 해를 받아 붉게 물든 파스텔 톤의 석조건물들, 건물 앞 계단과 외벽을 장식한 갖가지 꽃들, 창가를 화사하게 만드는 붉은 제라늄, 담장을 넘어온 풍성한 연보라빛 등나무꽃… 곳곳에 보이는 아름다운 꽃들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행복하게 해준다.
대성당을 비롯한 아시시의 건물들은 건축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아름다운 건물과 돌의 은은한 색채가 아시시를 동화나라 같은 분위기로 만든다. 엷은 갈색 혹은 분홍빛의 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들, 건물들 사이로 요리조리 벋어가는 작은 골목들, 사랑스럽고 매혹적인 도시이다. 걷다보면 실핏줄처럼 벋어있는 골목길을 따라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아시시를 특징짓는 따뜻한 파스텔 톤의 돌은 근처 수바시오 산에서 나오는 석회석이 섞인 돌이라고 한다.
아시시는 스폴레토 계곡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해발 400여 미터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며, 1,290미터의 수바시오 산 아래에 있다.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의 자치도시였던 아시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독일 황제의 지배를 받는 황제령과 로마 교황이 직접 통치하는 교황령 사이를 오갔다. 지금은 아시시가 페루자 현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두 도시가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아시시는 독일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파였으며 페루자는 교황을 지지하는 교황파였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두 도시 사이에 종종 전쟁이 일어났으며, 프란치스코도 두 도시 사이의 전투에서 페루자의 포로가 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표현이 하나의 관용어가 된 것처럼 아시시는 무엇보다도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d'Assisi(1182-1226)의 도시로 유명하다. 동시에 그를 따라 수도의 길을 걸었던 성녀 클라라Santa Clara d’Assisi(1194-1253)의 도시이기도 하다. 언덕 위의 도시 곳곳에 두 성인의 자취가 남아있는 아시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비롯하여 성 클라라 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 까르체리 은둔소 등등 많은 유적들이 언덕 아래 드넓은 아시시 평원을 내려다본다.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답게 1986년 10월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아시시에 모인 가운데 ‘세계 평화의 날’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이후 세계 종교 지도자 회의가 이곳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린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가 살던 12세기말 13세기초에 교회는 대단히 세속화되어 있었으며, 교황은 교황령을 통치하는 군주로서 독일 황제와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백년이나 지속된 십자군 전쟁(1096-1291)은 예루살렘이라는 성지 탈환을 위한 것이었지만, 종교는 물론 정치, 경제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잦은 왕래와 교역은 농촌을 기반으로 한 봉건제도의 쇠퇴와 도시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이는 화폐경제와 함께 상공업의 발달로 이어졌다. 상공업의 발달과 도시화라는 현상은 특히 이탈리아 북부에서 두드러져 이 지역에서 부유한 도시국가들이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기존의 수도원들은 이 시기에 새롭게 부상한 도시의 시민, 상인들의 종교적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다. 전통적인 수도원들은 주로 시골의 사람이 없는 숲이나 산속에 설립되어 농촌의 봉건제도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종교적 열망을 가진 시민들은 새로운 종교적 삶을 희구했다. 복음대로 살고자 했던 이들은 일종의 가난운동을 전개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 공동체가 기존의 세속화된 교회 안에 머무르기는 어려웠다. 청빈을 주장하는 프란치스코회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름다운 도시 아시시가 전성기에 이른 12세기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과 이탈리아를 오가는 피륙상인이었다. 기사가 되기를 원했던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와 페루자 사이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일 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그런데 일 년 간의 포로 생활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기사라고 하는 낭만적인 환상에서 깨어나 전쟁의 현실을 제대로 보게 했다.
부친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온 후 프란치스코는 스폴레토에 머물 때 신의 부름을 듣는 환시를 체험한다. 아시시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이전의 세속적인 즐거움을 멀리하고 가난한 수도자의 옷을 입고 다니면서 빈자의 삶을 살아간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 나환자, 걸인들이 그의 이웃이 되었다. 당시에 새로운 종교적 삶을 요구했던 도시 시민들의 가난 운동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걸인 같은 행색으로 복음을 전파하자 그를 따르는 동행자들이 많아졌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이 실행해야 할 회칙을 만들고, 1209년 이들과 함께 로마에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수도회 설립의 인준을 받는다. 인노첸시오 3세는 기존의 교회와 새로운 종교운동을 통합시키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던 사람이다. 이후에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이들은 ‘작은 형제회(또는 프란치스코회)’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1226년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나자 추기경 시절부터 프란치스코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2년 후인 1228년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그리고 1939년 6월 교황 비오 12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한다.
아시시의 아름다운 골목을 지나 숙소에 잠시 들린 일행은 짐 부릴 새도 없이 바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모두 밖으로 나왔다. 내일이 부활절, 오늘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전야 미사가 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조심스럽게 불빛을 밝힌 골목길은 낮의 활기와 달리 은근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대성당 앞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아치형 문 너머 어둠 속에서 대성당의 위용이 둥두렷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 불빛을 밝힌 대성당도 아름다웠지만, 그 앞의 광장이 더 인상적이었다. 특히 좌우로 아치가 연이어진 회랑을 거느린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아시시에 도착할 때 밖에서 바라본 대성당의 모습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광장을 좌우에서 감싸고 있는 긴 회랑이 밖에서 보면 마치 성곽이나 거대한 요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넓은 광장이 있었던 것이다.
성당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리가 없어 뒤에서 서성대며 미사를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성당 옆 계단에 올라가니 잠시 후에 흰 사제복의 신부들이 밖으로 나와 삼각형으로 둘러서는 게 아닌가. 거의 오십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삼각형의 한 쪽에는 불이 피워져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한 신부님이 성경구절을 낭독하면서 어린 소년 복사와 함께 불 전달식을 하는 것 같았다. 신부님의 낭송이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는 전달받은 불을 들고 다함께 줄을 지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따라 들어갔다. 성당 안에서는 제단에서 시작된 불을 각자 미리 나누어 받은 작은 초에 붙이고, 불은 제일 뒤까지 전달되었다. 불을 전달하는 의식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미사가 시작되었다.
앞에서 전하는 말이 이탈리아어인지 라틴어인지 알 수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자리에 앉아서 부활절 전야 미사에 제대로 참석하고 싶었다. 장엄한 종교의식을 제대로 느끼고 싶었지만, 사람들도 많고 제단이 너무 멀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한 삼십여 분 지나자 결국 일행은 모두 밖으로 나왔다. 미사는 계속됐지만 신부님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고 오래 서있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우리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수비아코에서 바뇨레죠를 거쳐 이곳 아시시로 온 것이다. 모두들 피곤했다. 우리는 다시 어둠에 잠긴 골목들을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