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주연 Jul 02. 2020

산 너머 凸

지금의 등산처돌이로 이끈 첫 등산의 기억(feat. 관악산)


비가 와서 주말에 등산을 못 하면 일주일 내내 우울하고 평일 아침 출근 전에 동네 뒷산으로 향한다. 주변에서 ‘등산처돌이’라 불리지만 사실 성인이 되고 내 발로 산을 찾은 건 작년 9월, 그러니까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나도 이렇게 등산에 빠지게 된 스스로가 신기하다. 작년 9월, 여름의 끝자락에 친구들과 시작한 관악산 등산 이후 등산의 매력에 제대로 눈을 떴다.



어른들 말 중에 틀린 게 없다고, 정말 시작이 반이었다. 산을 볼 때마다 예쁘다- 혼잣말을 할 정도로 등산 욕구는 쌓여갔지만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던 찰나, 15년 지기 친구 세희가 방아쇠를 당겼다. 지난주에 남자친구를 따라 북한산을 다녀왔는데 욕 나오게 힘들었지만 너무 재밌었다며 같이 등산 가자고 꼬셨다. 알고 보니 세희의 남자친구는 10년 넘게 산을 다닌 프로산악인이었다(!) 의외로 해답은 가까이 있었다.


여좋시(여전히 좋은 시절의 줄임말로, 술 마시다 정한 우리 모임의 이름) 단톡방에 불이 났다.

 “나 등산화 없는데 괜찮아? 옷은 뭐 입어야 해? 청바지 입고 가도 돼?” 

등산이라곤 아빠 손에 억지로 끌려간 기억밖에 없는 등린이 셋은 하나부터 열까지 대혼란 상태였다. 그나마  일주일 전에 등산을 다녀온 세희가 컨버스화 신고도 오를 순 있지만 발 편한 운동화가 좋을거다, 레깅스나 트레이닝복 입으면 된다 등 1회 경험자로서의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먼저 산부터 정하기. 첫 등산인만큼 서울에서 너무 멀지 않은데다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관악산으로 골랐다. 오가는데 진이 빠져버리면 등산에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근데 관악산 가려면 어느 역에서 만나지?” 지금 보니 아주 무지한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산이든 코스가 최소한 2~3개 이상이라 시작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만나는 곳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관악산의 경우 사당역, 서울대, 과천에서 시작하는 코스가 대부분이었다.


포털사이트에 ‘관악산 초보 코스’라 검색해 후기를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이십여년의 세월동안 등산 블로그를 찾아본 적이 없어서 몰랐던 사실인데 본인이 다녀온 등산 코스를 이정표가 나타날 때마다 아주 세세하게 찍어서 올려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이제껏 몰랐던 세계가 뿅!하고 나타난 기분이었다. “이 블로그는 연주대까지 2시간 걸렸다고 하니 초보 코스로 괜찮은 것 같아.“ 그렇게 블로그를 유일한 지도 삼아 사당역에서 출발해 서울대 공대로 내려오는 약 3시간짜리 코스로 정했다.


멤버는 예원과 세희. 참고로 우리가 만난 날 중 열에 아홉은 술이 빠진 적 없다. 여자 셋이서 카페에서 만난 적도 없다. 그런 우리가 등산을 하겠다고 주말 아침에 모이다니. 등산 당일, 예원이 갑자기 두려워졌는지 대안을 던지기 시작했다. 

‘야 인왕산 쉽대. 아니면 청계산 어때?’ 첫 산은 좀 빡세야 기분 전환이나 새로운 경험이 안 된다며 막 등산과 사랑에 빠진 세희가 칼같이 잘랐다.


일요일 낮 12시, 평소라면 침대에 딱 붙어있을 시간이었다. 사당역에서 등린이 셋이 모였다. 사당역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하나씩 먹고 나니 열두시 반. 등산로 입구는 아파트 언덕길을 20분 올라야 있었다. 벌써부터 숨이 가빠오며 지금이라도 포기할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형광색 등산복을 입은 아줌마아저씨들은 벌써 하산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운명을 모른 채 산을 타기 시작했다.

2018년 서울시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SNS상에서 가장 사랑받은 산 2위로 관악산이 뽑혔다(1위는 북한산) 관악산의 연관어로 ‘휴식, 가벼운 산책과 리프레쉬’ 등이 있었는데 여러분! 이 자료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괜히 ‘악’자가 들어가는 산은 악악 소리가 날만큼 빡센 산이라는 말이 있는게 아니라고요!!!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쉬운 코스라면서 이렇게 바위를 계속 올라야 한다고? 알고 보니 우리가 정한 사당역-관음사-연주대 코스는 중급자 코스로 꼽히는, 절대 쉽지 않은 코스였다. 블로그와 이정표를 따라 가는데 자꾸 코스를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지도 어플리케이션에 등산 코스가 나와있을 린 없었고 산 속이라 GPS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산 정상은 아득히 보이는데 시계를 보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산행 초보자들의 꿀팁. 사교성을 장착하라. 산에는 아버지뻘 아저씨들이 게임 속 NPC처럼 꼭 한 분씩 꺾어지는 길목마다 앉아 있다. 아저씨들은 누가 봐도 초보인 우리들이 귀엽다는 듯 “여기서 온 만큼 더 가야해 힘내~”라고 토닥여주었다. 네..? 저희 두 시간 왔는데 두 시간을 더가야한다고요?..

혹시 이 돌무덤 중에 내 무덤도 있는걸까


대학교 미팅의 단골 게임, ‘산 넘어 산’이란 술자리 게임이 떠올랐다. 앞사람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한 후 돌아가며 동작을 하나씩 추가하는 게임인데 한 동작이라도 빼먹거나 틀리면 술을 마시는 게임이다. 관악산 사당역 연주대 코스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돌 넘어 돌’이었다. 아무리 악 소리 나는 산이라지만 바위가 이렇게 계속 나올 일인가? 바위 계단, 작은 바위, 큰 바위, 흔들거리는 바위... 바위도 종류별로 나타났다. 어떤 바위는 경사도가 하도 높아서 진화한 인간의 산실, 직립보행을 포기하고 양손 양발을 사용해 엉금엉금 사족보행으로 올랐다. ‘산 넘어 산’ 술게임과 등산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내려놓고 금수가 되는 것인가…


산 너머 ㅗ


나중에는 로프 줄까지 잡고 오르고 나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블로그 주인 보시오. 초보 코스란 말 함부로 썼다가 지금 세 사람의 허벅지를 작살내는 중이니 반성하시게. 등산을 시작한 지 벌써 3시간 째.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하산 시간이 늦어질 위험이 있었다. 이러다가 정상을 못 보고 하산하는거 아닌가 하는 진지하고 합리적인 의구심이 들 때쯤 “아가씨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야 힘내”라고 내려가시는 분들이 세 등린이를 응원해주셨다. 그래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내려가는 게 더 일이야… 조금만 더 가보자.

정말로 조금만 더 가니 정상이었다. 632m 연주대 정상석을 보는 순간 ‘끝.이.다’ 세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발끝에서부터 성취감이 밀려왔다. 600m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의 멋진 풍경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얼음물과 아이스크림. 아이스박스 아저씨의 존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2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연주대 정상석 앞에서 인증샷도 찍었다. 

이 높은 연주대에서 뚱뚱한 몸매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고양이님들을 구경하며 한참 놀다가 서울대 공대 뒷길로 하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관악산 정상으로 가는 가장 빠른 코스는 서울대 공대 뒷길에서 시작하는 코스로, 연주대까지 1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이 길 때문에 관악산이 ‘가볍게 힐링하는 산’이라는 말이 나왔지 않나 싶다. 하지만 쭉 계단으로 이어진 길이라 재미는 없었다.


김동률의 신곡 <여름의 끝자락>을 들으며 내려오는데 시원한 산 바람이 티셔츠 안으로 훅 들어왔다.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름 산의 초록빛이 이토록 눈부시고 청량했구나. 평소엔 절대 볼 수 없는 자연의 색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등산 후의 암묵적인 룰, 막걸리에 전을 걸치며 등린이들의 첫 정상 정복을 축하했다. 등린이들의 첫 등산 후기는 힘들었지만 우리가 해냈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하고 짜릿하다는 것.


다음날 여좋시 회원님들의 단톡방이 울렸다.

“살아있냐?”

“죽을 것 같아.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야.”

“그래도 자꾸 생각나 또 산 가고 싶어”

“응 의외로 정상은 별로였어 올라갈 때 바위들을 헤치고 가는 그 느낌이 좋더라”

“10월에 단풍보러 또 가자”



매거진의 이전글 산린이, 등산에 눈 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