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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주연 Jun 24. 2020

산린이, 등산에 눈 뜨다

등산은 엄빠들의 취미인 줄로만 알았는데 20대에 등산에 반해버릴 줄이야.

어릴 때부터 통통한 종아리 알이 콤플렉스였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을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교복 치마 아래 매끈한 다리가 가장 부러웠다. 각종 다리 얇아지는 스트레칭은 다 섭렵하고 틈 날 때마다 종아리 알을 하도 눌러 대서 종아리 근육을 따라 파랗게 멍이 들 정도였다. 팔다리가 마른 체형인데도 불구하고 종아리 근육이 발달한 건 아빠를 따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빠에게 끌려갔던 등산 때문이었다.


알로 탕을 끓여먹어도 되겠다


엄마아빠의 첫 아이였던 나는 2.2kg의 저체중으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서 2주를 보냈고 자라면서는 아토피까지 생겨 병원을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허약 체질이었던 내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 아빠가 선택한 방법은 등산이었다. 주말 아침 디즈니 만화극장이나 반올림이 시작하기도 전에 (앗 이러면 나이가 벌써 탄로나는데) 아빠는 자는 나를 끌고 나가 집 뒤 산을 올랐다. 하필이면 집 뒤가 부산의 명산, 금정산이어서 아빠의 체력이 좋을 땐 800m 고당봉에 가거나 금정산성에 씩씩거리며 올라 물떡을 한 입씩 물고 내려오곤 했다.


아빠의 강도 높은 등산 훈련 덕분이었는지 초등학교 6년간 릴레이 선수에서 제외된 적 없을 정도로 수영, 마라톤, 달리기… 각종 유산소 운동에서 또래보다 훨씬 뛰어났다. 하지만 대한민국 모든 중학교 1학년에게 체력 vs 주말 아침 늦잠과 매끈한 다리 중 어느 걸 택할래, 물어보면 열이면 열 하나, 후자를 택할 것이다.

산에 빠지게 되며 아빠와 같이 등산을 갔는데 아빠가 고백했다. 본인은 심장이 안 좋아서 등산을 안 좋아한다며 ... 아니 분명히 20년 전엔 저랑 매주 등산다니셨잖아요;;


 등산을 하려면 유일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에 새벽 6시엔 일어나야 하는데다 겨우 풀어놓았던 종아리 알이 등산 한번이면 아무런 소득 없이 볼록 올라온다고! 그러나 쇠고집 울 아빠에게 그건 등산을 가지 않을 이유조차 되지 못해서 고3이 되기 전까지 나는 매주 산으로 끌려갔다.

“산에 오니까 진짜 좋제? 정상 오르니까 성취감 장난 아이제? 산에 오면 인생을 배운다”

아빠는 신이 나서 매번 산이 왜 좋은지 설파했지만 수십 번 등산을 가는 동안 내가 생각한 건 오로지 하나. ‘빨리 내려가서 쉬고 싶다’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드디어(!) 나는 등산에서 해방되었고 29살이 될 때까지 내 의지로 산에 간 적은 맹세코 단 한번도 없다. 그렇다. 나는 등산극혐주의자였다.



나의 노화는 스물일곱부터 시작됐다. 어느 순간 산이 너무 예쁘다고 친구에게 말했더니 돌아온 말은 “산이 좋아지기 시작하면 나이 드는 증거래”였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자마자 기가 막히게도 산이 눈에 들어왔다. 한 침대에 자도 아무 일 없을 것 같던 남사친이 갑자기 잘생겨 보이고 남자로 느껴지는 것 마냥 산이 예뻐 보였다.


프랑스 서쪽의 낭뜨라는 시골 마을에서 음악 페스티벌 자원봉사자로 일할 때의 일이다. 페스티벌에서 친해진 프랑스 친구가 “나를 한국에 초대한다면 뭘 보여주고 싶어? 한국에만 있는 게 뭐가 있어?”하고 물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경복궁이나 전주한옥마을같은 한옥도 예쁘긴 한데 왠지 12시간을 날아 한국까지 올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한강에서 먹는 치킨도 좋긴 한데 아, 얘네는 센 강이 있지. 동해나 제주의 맑은 바다를 내세우자니, 프랑스 남부엔 니스가 있었다.

“음식도 맛있고..음..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해서 봄여름가을겨울 다른 꽃도 볼 수 있고..”

더듬더듬 프랑스엔 없는, 한국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찾아내고 있는데 친구가 아! 하고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TV 다큐멘터리에서 봤는데 한국에는 산이 정말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것이었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가까이에 산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고.



그때 머리에서 누가 징을 울린듯 댕-하는 소리가 났다. 아, 우리나라의 산이 외국인들 눈엔 신기해보이겠구나. 생각해보니 파리나 밀라노같은 유럽 도시에 언덕은 있어도 산은 없었다. 반면 고향인 부산만 생각해봐도 산비탈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6년간 등교했고 10년째 살고 있는 서울은 광화문에서 세종대왕 동상을 바라보면 동상 뒤에 인왕산이 멋지게 버티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친구는 평야밖에 없는 프랑스 서부에 살고 있으니 평야 끝에 산이 있는 풍경이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프랑스 친구와의 대화가 눈에 낀 무언가를 제거해준 느낌이었다. 그 대화 이후 우리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산을 의식하게 됐는데 정말로 우리나라는 시선 돌리는 곳마다 산이 있었다.



해외 출장을 최소 한 달에 한번, 많으면 두 번까지도 나가는 직업 특성상 비행기를 탈 일이 많은데 하늘 위에서 우리나라를 바라볼 때마다 산이 이렇게 많았나, 하고 매번 놀란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나라 국토의 70%는 산이다. 도시에서 삼십년간 나고 자란 까닭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출장으로 다녀온 국내 여행지 중 가장 좋았던 장소를 꼽자면 언제나 나는 문경이라 답했는데,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봉긋하고 초록초록한 여름 산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2박3일의 촬영이 끝나고 돌아와 찍은 클립들을 확인해봤는데 죄다 산이 찍혀 있었다. 기차역을 개조한 카페 뒤에 산, 퓨전한식 맛집 뒤에 산, 그냥 지나가다 산… 큰일났다. 20대 팔로워들에게 “문경엔 멋진 산이 있으니 꼭 오셔야 해요”라고 말하면 잘도 먹히겠다. 나이를 먹으며 창작자로서 감을 잃었어! 절망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은 변화였다. 등산극혐주의자인 내가 산을 보며 감탄하고 있다니. 산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라고 늘 주장하고 다녔던 내가! 자연스럽게 등산에 관심이 생겼지만 왠지 엄두가 안 났다. 우선 등산화, 등산가방, 등산복 등 장비를 갖춰야할 것 같았다. 같은 옷인데 ‘등산’이라는 말만 붙으면 가격은 또 왜 그렇게 비싸지는지.

게다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울 초보 등산 코스, 라고 찾아봤는데 같은 산에 코스가 최소 서너개 이상이다..?! 혼자 가기엔 망설여졌고 주변에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없었다. 어릴 때 지옥처럼 힘들었던 등산의 기억도 ‘가볼까 말까’ 고민하던 마음을 언제나 말까 쪽으로 접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관심은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등산,하면 40,50대가 즐기는 활동이란 인식이 강했다. 산에는 형형색색 컬러풀한 옷을 입은 엄마아빠 나이대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보쌈에 막걸리를 마시며 “뭣도 모르는 게 산에 왔어?” 하는 표정으로 비웃지 않을까, 그 틈바구니에서 뻘쭘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은 등산할 땐 아니지,하며 등산에 대한 욕구를 자꾸 미뤘다. 29살의 가을, 친구 S가 프로등산러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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