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레이리스트 #12
우리는 은연중에 세계(世界)를 너무 좁게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는 미국, 그 중에서도 동부 뉴욕과 서부 LA로 대표되는 소위 ‘잘 사는 구역’에 국한될 때가 많다. 유럽으로 넘어가면 북유럽이나 서유럽 같이 비교적 넉넉한 나라들을 떠올린다. 동양에선 일본이나 홍콩, 상하이 같은 도시화‧문명화된 몇몇 곳이 포함되는 정도일까.
우리 입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나오는 이유도 이런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세계’로 인식하는 선진국 중에선 분명히 우리보다 나은 국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장점과 우리의 현주소를 비교하면 단점들이 부각되면서 순식간에 이곳이 지옥(hell)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가 지옥이라고 외칠 여력이 있다는 그 사실이 역설적으로 이곳은 지옥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그저 천국이 아닐 뿐.
우리의 좁은 인식과는 별개로 세계는 매우 넓다. 그리고 이 넓은 지구에서 대한민국의 상황은 ‘아주 좋은 편’이라는 게 통계가 알려주는 진실이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 헬조선론의 많은 논리는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내가 헬조선론을 비판하되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는 이유다.)
뛰어난 저작인 ‘팩트풀니스’에서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은 세계를 4단계로 구분한다. 1인당 하루 소득 기준으로 1단계는 하루 1달러, 2단계는 하루 4달러, 3단계는 하루 16달러, 4단계는 하루 32달러 이상이다.
32달러를 한화 4만원으로 치고 단순 계산하면 한 달 수입은 120만원이 된다. 이는 대한민국 최저임금에도 미달하는 적은 돈이다. 바꿔 말하면, 한스 로슬링의 기준을 적용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을 받을 정도로 경제 사정이 안 좋은 사람조차 지구 전체에서는 최고 단계에 속한다. 이것이 진짜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공간에는 ‘1단계의 세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곳에선 영화 ‘가버나움’이 결코 영화일 수만은 없다.
‘가버나움’을 다 보고 나서 놀라움을 느낀 포인트가 2개 있었다. 우선 첫째, 이 영화가 실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레바논 빈민촌에서 있었을법한 사건을 다루지만 실제 이야기는 아니다. 단, 얼마든지 일어나고도 남을 일들이라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에 ‘82년생 김지영’이 있다면 중동에 ‘200X년생 자인’이 있다고 하면 될까.
우리는 신화나 전설을 대할 때 그걸 그저 허황된 이야기로만 치부하지 못한다. 그 이야기들은 언뜻 허황돼 보이는 형식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포함한 픽션도 마찬가지다. 픽션은 만들어진 이야기지만, 그 가공의 과정에서 이야기꾼은 거짓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진실을 운반하는 도전을 감행한다. ‘가버나움’은 실화 기반이 아니지만, 그럼으로써 이 사건이 누구 한 명에게만 일어나는 특수한 비극이 아니라는 점을 효율적으로 폭로한다.
더욱이 이 영화는 실제 난민들을 배우로 기용하며 리얼함을 더하고 있다. 자인을 연기한 배우의 이름이 자인인 식이다. 이들은 자신의 실제 삶을 연기하는, 언뜻 중복된 행동으로 보이는 이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실제보다 더욱 묵직한 픽션의 무게감을 전해준다.
‘가버나움’의 두 번째 놀라운 포인트는 이 영화가 지금 이 시대, 즉 우리와 현재의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어딘가에서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영화적인 부분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타임머신의 많은 특전을 누리고 싶다면 세계 여행을 해보라고 권했다. 실제로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의 70년대, 우리의 80년대가 저랬을까 싶은 장면들을 자주 보게 된다.
‘가버나움’ 속 장면들은 우리의 언제쯤을 재생하고 있을까. 아무리 후하게 잡아도 1950년 한국전쟁 무렵까지는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전쟁 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이 가족도 친구도 잊은 채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다는 슬픈 이야기들을 우리는 한번쯤 들은 적이 있다.
자인의 텅 빈 눈동자는 비슷한 무렵에 태어난 우리 주변의 아이들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또 다른 마음 아픈 장면은 빈민가의 아이들이 장난이라기엔 너무 섬뜩한 느낌의 전쟁놀이를 하는 모습들이다. 차라리 1950년대에서 건너왔다고 믿고 싶은 장면들이 이 영화 곳곳에서 등장한다.
우리나 그들이나 초속 460m로 자전하는 지구를 공유하며 살고 있지만, 같은 별에 살고 있다는 것만 빼면 그들과 우리 사이엔 공통점이 거의 없어 보인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맹점 속 그들의 비극은 우리가 그들을 몰랐던 시간만큼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일반적인 수준의 도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년을 극한의 상태로 몰아붙인 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어렵지 않게 우리는 용의자를 지목할 수 있다. 자인의 부모들이다. 고작 11살의 딸아이를 팔아넘기다시피 시집보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해놓고도 천연덕스럽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그들 말이다.
심지어 자인이 그들을 고소하자 이들은 이웃 사이에서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먼저 우려한다. 이는 이슬람권에서 횡행하는 명예살인을 연상시킨다. 명예살인은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강간당한 딸을 죽이는 관습이다.
영화 속 사하르는 물론 부모의 손에 죽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애는 또 낳으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사하르를 두 번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을 비난하려는 변호사에게 꽤 그럴듯한 항변을 한다. 당신이 우리처럼 살아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우리를 비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았지만 그들의 길을 가지 않은 한 소년의 이름을 이제 안다. 자인이다. 자인에게 양심을 알려준 사람도, 제대로 된 사랑을 알려준 이도 아마 없었을 것 같은데, 이 소년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를 보며 우리는 인간이 선하게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다시 한 번 부여잡는다.
어린 나이에 이미 갱스터 래퍼 수준의 찰진 욕을 섭렵한 이 시니컬한 꼬마 아이가 딱 한 번 천사처럼 웃을 때, 꽁꽁 얼어있던 우리의 마음 속 일부가 녹아서 눈물로 흐른다. 저들을 보며 위안을 삼고 우리의 처지를 긍정하자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야박한 얘기가 된다. 우리의 처지를 긍정할 수 있다면 그 힘으로 저들에게도 위안을 주자고 말하는 게 아마 맞는 순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