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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우씨 Dec 05. 2020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영화플레이리스트 #14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20년에 다시 보는 이 영화는 우리가 지나온 시절에 대한 회상,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 그리고 그 이후 보내온 시간들에 대한 편안치 않은 질문으로 다가온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이누도 잇신 감독의 2003년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대한 리뷰 중에는 이동진의 것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우리가 도망쳐온 것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여기서의 도망은 물론 주인공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가 친 것이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 소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와 사랑에 빠졌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결국 도피한다.


우리 중 누가 그래본 적이 없겠는가? 츠네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일부분을 닮아있었다. 어렸던 우리, 미숙했던 우리, 인생이 서툴렀던 과거의 수많은 ‘나’들.


이동진의 글은 이 영화를 우리의 미숙함을 달래는 연고처럼 느끼게 만들어줬다. 그땐 그랬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만 해도 낫는 기분이 들었다.


해결책까지 제시해줄 필요도 없었다. 괜찮아, 아프니까 청춘이잖아,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인생영화’로 꼽을 수 있었다.



2003년. 21세기는 막 시작된 차였고 우리 모두에겐 ‘최첨단’을 살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를 기습하더라도, 적어도 우리에겐 이 영화 한 편이 있을 것이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재생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됐다. 조금 미숙해도 우리의 실수를 축복하고, 부박함을 성숙함으로 보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화면 속에 펼쳐질 테니까.


하지만 그 이후 2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2003년의 ‘최첨단’은 조금씩 낡은 과거로 변해갔다. 오바마 당선, 노무현 사망, 미국의 금융위기를 과거의 시간으로 밀어내는 동안 새로운 아이들은 끊임없이 태어났다. 그렇게 우리는 공짜로 어른이 됐다.


2020년에 와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꺼내보게 만든 데에는 김종관 감독의 리메이크가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일본 원작의 위상은 여전해서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리메이크가 달갑지 않다는 시선도 많다. 이미 완벽한 마스터피스에 한국식 사족을 붙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미다.


한국판 리메이크《조제》(2020)


한국 버전의 리메이크를 확인하기 전에 복습 차원에서 다시 본 이 영화는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츠네오의 도망을 더 이상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의 도망이 상습적이라는 사실이다. 일단 조제를 만나게 된 것부터가 변변찮은 현실로부터의 도망이었다. 아는 것 많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조제는 츠네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유발하면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조제가 처한 환경도 츠네오에겐 완벽했다. 그녀의 할머니는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나 나올 것 같은 행색을 하고 있다. 집 주변을 배회하는 어린 꼬마들 역시 만화에서 나올법한 요정의 역할을 수행한다. 조제가 사는 곳은 츠네오에게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신비로운 일탈의 공간이었다.


그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만나는 기분으로 조제에게 다가갔던 게 아닐까.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시궁창 같은 현실의 반대급부를 만들어낸 것이다. 관찰자와 구세주의 역할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기회는 1년 남짓한 시간동안 도망쳐 있기에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도망에서 시작된 조제와의 로맨스는 도망으로 끝난다. 가나에(우에노 주리)에서 조제로 도망쳤던 과거는 다시 조제→가나에로 도피하는 과정을 통해 수미쌍관을 이룬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츠네오의 성장담으로 해석하지만, 이 관점으로는 츠네오가 하필 가나에에게 돌아가는 행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원래 살던 대로의 패턴을 반복한 것뿐이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했다는 해석이 더 온당하다.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맴돌고 있다.


‘어른공룡 둘리’를 상상하는 기분으로 츠네오의 2020년을 추측해보자. 그의 나이 이제 마흔을 넘겼을 것이다. 가나에와의 사랑은 안정적이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은 우리도 세상물정에 대해 파악했다.


츠네오는 아마 또 다른 누군가(뭔가)에게로 도망쳤을 것이고, 심지어 지금도 그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의 미숙함과 부박함을 마냥 축복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조제의 2020년은 어떨까. 불편한 다리가 나아졌을 확률은 없어 보인다. 영화는 그녀가 휠체어를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장면으로 끝났지만, 우리가 극장을 떠나도 조제는 조제의 삶을 20년간 계속 살았어야만 한다.


과연 그녀가 그 이후 또 다른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고 낙관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만큼은 우리도 세상 속에서 상처 받았다.



슬픈 것은 그녀가 이미 츠네오와 함께 있던 물고기 호텔에서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할 것이었고, “그래도 괜찮다”고 애써 말했지만 정말 괜찮았을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헤어지고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었다”는 츠네오의 말도 더 이상 아름답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그는 그런 미사여구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조제의 암울한 미래를 대면할 가능성을 차단했던 건 아닐까.


2020년의 우리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조소하며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 받아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 논했던 혜민에게는 “멈추면 너희 집 한강뷰가 보이겠지”라고 비꼬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더 이상 이 영화가 아름다울 수만은 없으며, 다시 이 영화를 재생하는 우리의 마음이 안녕할 수만도 없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아프도록 절감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말 지독히도 바뀌지 않고, 사람의 정신은 진보하지 않으며, 결국 우리는 같은 실수를 끝도 없이 반복한다는 것을.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이 영화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래서 당혹스럽다. 20년간 방치돼 있던, 잊고 있던 차량의 주차비 계산서가 어느 날 문득 날아와 가슴팍 한가운데 꽂히는 기분이다.




팟캐스트 방송 '호우시절'에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뷰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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