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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우씨 Mar 16. 2021

셀럽의 탄생 - 트루먼 쇼

영화플레이리스트 #17

※ 이 글에는 영화 《트루먼 쇼》와 소설 '멋진 신세계'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트루먼 쇼》

이 영화가 나왔을 때만 해도 우리는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믿었었다.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의 개봉 시기는 1998년이다. 30년 가까이 성실하게 살아온 한 남자의 모든 일상이 TV로 생중계된다는 발상이 영화화됐을 때, 주변에서 흔하게 들려온 말은 이런 거였다.


"나도 저 생각 한 적 있는데. 누가 먼저 영화로 만들었네."


자신의 삶이 몰래카메라이며 누군가 나의 행동과 판단, 내면의 어둠과 그늘까지를 전부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의 뿌리에는 '주인공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은 내가 눈을 떴을 때 돌아가고, 내가 잠들 때 멈추며, 지구라는 행성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아니 착각.


이 관점에 입각해서 영화를 보면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존엄성을 압류당한 불쌍한 남자이기 이전에 수십억 명의 애정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궁극의 '인플루언서'다. 또한 이 시선으로 보면 자신의 모든 영향력을 뒤로 하고 세트장 밖으로 뛰쳐나가는 트루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우리에겐 경외심 이전에 걱정이 앞선다. "정말 괜찮을까?"

트루먼이 30년간 삶을 영위한 씨 헤이븐(Sea Haven)의 최종 설계자 크리스토프는 탈출을 시도하는 트루먼을 끝까지 만류한다. 이때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은 여러 가지다. 에덴동산의 유일한 룰을 어긴 아담을 바라보는 신의 시선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과 원망이 혼탁하게 뒤섞여 있다.


크리스토프는 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실수들을 노출하며 스스로 붕괴한 씨 헤이븐이 '완벽한 곳'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이대며 집요하게 트루먼을 붙잡는다. 그는 왜 그곳이 완벽하다고 주장했을까?


이는 그가 정말로 씨 헤이븐이 완벽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트루먼에게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난한 곳일지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즉, 바깥보다는 씨 헤이븐 안쪽에서 그나마 완벽에 가까운 행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미다.


크리스토프는 실제 세계를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 찬 절망의 공간으로 본다. 반면 씨 헤이븐은 오로지 트루먼을 위해 설계된 공간이며, 사소한 문제점들이 있다 한들 보완해나갈 수 있다는 게 크리스토프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씨 헤이븐이 트루먼에게 진정한 '헤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게 아닐까?

크리스토프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절망의 공간'으로 본다.

만약 크리스토프가 트루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 어떤 전개가 이어졌을지 상상해보자. 트루먼은 이제 쇼의 룰을 눈치 채고 역이용한다. 시청자들에겐 진실을 숨긴 채 계속 안정된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그동안 트루먼이 온 세상에게 속아왔다면 이젠 그가 세상을 속일 차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경우 그의 삶이 제법 멀쩡하게 굴러갔으리라는 추정을 자꾸만 하게 된다. 이 상황은 우리가 현재 숱하게 많이 보고 있는 리얼리티 쇼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걸 연기로 점철해야 하는 삶은 물론 힘들 것이다. 그러나 잠깐씩 찾아오는 휴식시간에 통장 잔고를 보면, SNS에 올라오는 팬들의 반응을 보면 없던 힘도 솟아나지 않을까? 사랑하는 실비아를 씨 헤이븐으로 데려오는 조건까지 가미된다면 그가 이 상황에서 느끼는 만족은 더욱 커졌을지 모른다.

 영화가 발표된  2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셀럽들이 갖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들 인플루언서들은 인스타그램이라는 정사각형 안에서 그야말로 정사각형처럼 완벽 (적어도 그래 보이는) 삶을 영위해 나간다.


정사각의 사이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어둠들이 있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음에 올라올 새 게시물이 충분한 '좋아요'를 끌어낸다면 문제는 해결될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삶이란 그런 문제 해결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우리 중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영향력이라도 갖고 있는 그들의 삶이 더 나은 것 아닌가?


모든 고통이 과학과 약물의 힘으로 통제된 미래사회를 상상했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도 트루먼 같은 용감한 인물이 하나 나온다. 미개사회(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 출신의 존이라는 인물이다.


존 역시 신세계의 룰에 맞서 고통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미개사회로 돌아가길 용기 있게 선언한다. 존은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한다. 이는 영화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과 겹치는 부분이다. 하지만 헉슬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자유를 얻은 존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는지까지 상상한다.

리얼 월드로 나온 존은 결국 자신을 둘러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멋진 신세계'는 마무리 된다. 우리는 트루먼의 선택이 존과는 다르길 바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예감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만 해도 우리는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생각은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특별할지 모른다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 하나의 특별함이 명품처럼 탄생할 때 수많은 평범함은 공산품처럼 양산된다.


인간은 불평등하며 우리 중 누군가는 다른 사람보다 더 존엄할지 모른다는 의혹은 불길한 예감처럼 우리의 내면을 흔들고, 때때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우리는 운명의 스포트라이트가 우리를 비추지 않는 상황에 점점 적응해 간다. 그것이 《트루먼 쇼》와 처음으로 조우했던 1998년 무렵부터 지금까지 당신과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영화 발골채널 '호우시절'에서 《트루먼 쇼》를 리뷰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호우시절' 유튜브

'호우시절' 오디오클립

'호우시절' 인스타그램

'호우시절' 조쿠나 쉐프의 《트루먼 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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