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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쿠나 Feb 23. 2021

『트루먼, 편안함에 이르렀나』

영화, 트루먼쇼를 읽다

트루먼쇼 스틸컷, ©해리슨앤컴퍼니

트루먼, 이름은 ‘진짜 사나이’지만, 이름과는 반대의 삶을 사는 남자.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 진짜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아 때 방송국에 입양된 그의 삶은 시작부터 TV 카메라로 중계됐다. 가족은 물론이요, 일곱 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마저 투입된 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사람은 짜여진 극본대로 움직이는 직업인이었고, 그가 사는 사회는 리얼월드가 아닌, 5천여 대의 카메라 렌즈가 정교하게 배치된 리얼리티쇼의 세트장 '씨헤이븐'이었다. 거대한 세트장 안에서 진짜는 감독 크리스토프의 말대로 오직 트루먼, 자신뿐이었다.


그럭저럭 감쪽같았다. 다소 의심되는 정황은 있었지만 ‘우연’이란 이름으로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많으니까. 그 모든 우연에 하나하나 다 시비를 걸고 있으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벗어나려고 해 보면, 험상궂은 큼지막한 개가 갑자기 나와서 어린 트루먼을 물듯이 위협적으로 짖어대거나 방구석에서 느닷없이 누군가가 튀어나와 희한한 소리를 외치기도 했지만. 다 어릴 때였으니까, 그냥 그런 거니까 하고 그는 넘겼으리라. 결국 그렇게 조금 튀고 조금 이상한 것들을 넘기면서 살다 보니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에서 괴물체 하나가 날아와 그의 잔디밭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우연이란 이름 하에 그저 여느 날처럼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첫사랑 실비아의 말은 그에게 제법 깊게 남아 있었다. 마당 앞에 놓였던 괴물체는 도화선이었다. 죽었던 아버지가 거리의 노숙인으로 나타나고, 자동차 라디오 주파수는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트루먼이 움직이는 동선에 대한 지령이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 한 이상, 트루먼은 더 이상 우연과 일상의 뒤에 숨지 않기로 한다. 완벽할 것만 같았던 세트장, 씨헤이븐의 균열은 트루먼, 그의 마음의 주파수를 올바로 찾지 못하며 시작된다.

트루먼쇼 스틸컷, ©해리슨앤컴퍼니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의심인, '내 삶의 모든 것이 타인에게 여과 없이 공개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감독, 피터 위어는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살다 보면 어떤 사람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어느 날 대상이 되는 이가 내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 괜스레 위축되기도 한다. ‘혹시 저 치가 내 마음을 알고 나타난 것일까.’ 반대로 누군가를 열렬히 흠모할 때도 이 감정은 마찬가지다. ‘저 사람이 내 감정을 눈치챘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감정은  은밀한 속성이 있다.


지금도 범람하는 리얼리티쇼는 출연진의 행위를 엿보는 걸 넘어, 실제로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감정을 공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예능의 형식을 빌려 가볍게 표현하지만, 기저에는 ‘저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까’, ‘저 기분 나쁜 상황에서 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할까’라는 호기심이 시청자의 핵심 욕망이다. 은밀한 감정에 대한 관음적 시선 자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TV 프로그램은 정도나 형질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출연진의 동의 여부에 있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공개할 마음이 있으면 출연료를 받고 드러내는 것이고, 내 일상이 침해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면 출연하지 않는, 지극히 자연적인 인간의 권리이자 거래의 기본이 프로그램 구성의 전제이다.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에게는 이 기본적 전제가 생략되고, 선택의 권리가 박탈되었다는 점이 이 기상천외한 쇼가 갖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다. 비록 그는 전 세계의 스타가 됐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주인이 되지 못한다.


세기말에 연이어 나왔던 트루먼쇼와 매트릭스는 인생의 주체적 선택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약과 파란 약, 자신의 진짜 삶과 프로그래밍된 가상현실의 삶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했던 것처럼, 트루먼 역시 크리스토프가 만든 안온한 세트장과 바다 건너 세트장 밖의 리얼월드 중에 선택해야 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진보적 교육의 가치를 고민하게 했던 감독 피터 위어는, 트루먼쇼를 통해 다시금 인류가 잊고 있던 기본적인 가치들을 진지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일깨워 준다.  자유, 사랑, 그리고 신과의 관계까지. 영화 속에서 트루먼쇼가 종료되자, 쇼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다시 TV가이드를 살피며 새로운 유희를 찾는다. 그 장면에 대한 감상은 관객의 몫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인간은 무엇인가 마침표를 찍으면 이내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20세기는 이미 마침표를 찍었지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됐음에도 인간이 고민하는 것은 피터 위어가 1998년에 던졌던 물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자유의 범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으며, 오리지널리티와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시작에 대한 탐구는 계속해서 진행 중이며, 비록 무신론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주류에 입성했지만, 여전히 생과 사의 기로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내면의 물음에 인간은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다.

트루먼쇼 스틸컷, ©해리슨앤컴퍼니

오랜만에 1998년에 만들어진 영화 트루먼쇼를 다시 보고, 문득 2017년의 나의 아저씨가 생각났다.

"편안함에 이르렀나?"

이선균이 마지막에 던졌던 짤막한 물음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저씨들의 마음을 여럿 훔쳤다. 측은지심이라는 기본적 인간의 속성을 건드리는 물음이 내 안에 자국을 남긴 것일까. 혹은 피터 위어가 일깨운 가치가 내 마음속에 파동을 만든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트루먼, 그대는 편안함에 이르렀나.

그리고 당신. 당신은 true man으로 살고 있나.



작가 '원우 씨'와 네이버 오디오 클립과 유튜브에서 '영화 발골 채널 호우시절'을 운영 중입니다.

발길이 머물렀을 때 마음도 머무를 수 있도록 영화와 생각을 나누고 있습니다.



네이버오디오클립 호우시절 트루먼쇼

유튜브 호우시절 트루먼쇼

@howoos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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