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쿠나 Mar 18. 2021

『기억의 아포리아, 습작의 추억』

영화, 건축학개론을 읽다

삶을 살아내는 것을 고속도로를 지나는 것에 비유한다면 문제와 난관은 간판의 이름만 바꿔가며 계속해서 나타나는 주유소에 이를 수 있다. 어려움은 인간의 삶의 여정 속에서 쉼 없이 나타난다. 계속해서 각종 난제와 난문들을 마주하다 보면, 때론 살기 위해 문제를 극복하는 건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오죽하면 석가모니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 했을까.


어떤 문제는 어려울지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어렵지만 해결 할 수 있는 경우이다. 말 장난 같지만 이런 문제는 차라리 쉬운 편에 속한다. 힘을 들여야 할 방향이라도 정해져 있으니. 반면에 어떤 문제의 경우에는 원인조차 찾을 수 없어 전전긍긍 시간만 보내다가 급기야 질끈 눈을 감고 구석으로 처박게 되고 만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아포리아라 했다.

모른 척 외면하고 있다가 돌아봤을 때 어느새 순조롭게 해결 돼 있길 바라보지만, 삶에서 그런 행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인생에 공짜는 없다는 깨달음을 다시금 곱씹으며 머나먼 길 돌고 돌아 자의 반, 타의 반 아포리아 앞에 서야만 한다.


[아포리아,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을 이르며,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을 뜻한다.]



군데 군데 손볼 데가 많아 보이는 낡은 가옥을 쓰다듬는 여자의 심정도 그런 걸까.

성가신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는 여자, 양서연. 그녀의 인생은 돌이켜보면 그저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렸던 기록의 연속이었다. 왜 달려야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달리는 것 외의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매운탕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른 채 좋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으니 잠자코 먹으라는 주변의 소리에 계속해서 숟가락질을 해야 했던 것처럼 그녀는 마냥 달려야 했다.

문제와 선택지를 찬찬히 들여다 보며 살필 여유는 없었다. 오직 달리거나 멈추거나, 두 가지 보기만 있을 뿐.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했던 길이다. 서울에 가는 것, 강남에 사는 것, 아나운서에 도전하는 것,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 등 그녀의 결정 대부분에는 세상의 조언이 있었다. 목표한 모든 것을 손에 담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사람들이 괜찮다 말할 수 있는 결과 값도 얻어냈다. 관성은 무섭게 몸에 붙는다. 부자 남편과 이혼할 때에도 변호사의 말을 잘 귀담아 들어서 두둑하게 위자료도 챙겼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린 걸까. 어긋 세월을 거슬러 올라보니 미뤄두고 외면했던 문제, 시작점의 아포리아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자각이 그녀를 그리도 성가시게 하고 긴 호흡을 들이키게 한 걸까.


[서연의 표정은 그녀의 상태를 담고 있다.]


이 편에 양서연이라는 여자가 있다면, 저 편에는 이승민이라는 남자가 있다. 자고로 ‘집은 30년은 되어야 집’이라는 농담 섞인 자신만의 지론에 어울리게 이 남자 주변의 변화는 느리게 일어난다. 그의 현재는 과거와 맞닿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라 온 터전에서 여전히 살고 있으며, 전공과 무관한 삶을 살았던 서연과 달리 오직 그 길을 달려 마침내 꿈꿔온 건축가의 삶을 살고 있다. 비록 GEUSS라고 쓰인 티셔츠를 더 이상 몸에 두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의 모습에서 '게우스'의 잔상이 빠진 것도 아니다. 상당부분 그대로였고 변한다 해도 그 폭이 적었다. 물론 멈춰 있었던 건 아니다. 몸집만 자란 미성숙한 소년과 다름없던 대학 새내기는 자신의 영역에서 제법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전문가로 성장했고, 품고 있는 마음을 용기 없어 전달하지 못하고 도망쳤던 풋내기에서 수컷의 향기를 내는 어엿한 남자로 자랐다. 어느 하나 빠질 데 없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곁에 있다.


[엄태웅, 수컷의 냄새가 난다. 그게 꼭 담배 연기는 아니다. 오해는 마시길]


건축학개론 수업 이후 세상의 셈법에 맞춰 살아온 서연이나 레귤러트랙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승민의 궤적은 전혀 달랐지만, 이어폰 한 짝씩 나눠 들으며 연결됐던 두 사람만의 정서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 그들은 지금 같은 아포리아로 고민하고 있다. 멋모르고 달려온 삶의 이력에 대해서 때때로 한숨 지으며.



[수지가 저리 빤히 보면 눈을 맞추기 힘들지...이해한다 그 마음]


90년대 중반을 살아낸 청춘들의 현재를 조명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2012년 개봉작 건축학개론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90년대, 영화가 개봉했던 2010년 대 뿐 아니라 다시 개봉 1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파문을 일으키는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얄궂은 감정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청춘의 한 자락 성장통에 불과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젊은 날 움푹 패일 만큼 생채기를 내고, 심한 경우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차오르지 않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아포리아가 되기도 한다. 건축학 개론은 아물지 않은 첫사랑의 흔적 때문에 여전히 현재의 삶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심정을 남자와 여자 각자의 시선에서 비추고 있다.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의 과거 대학생 시절과 현재의 배역을 따로 구분 지어 각각 캐스팅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아역이 아닌 다 자란 성인 캐릭터를 촘촘하게 시기를 나눠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관객의 몰입을 저해할 위험성 때문에 대개의 경우 배우의 메이크업과 분장으로 시차를 구분하는데, 이용주 감독은 일반적 문법과는 다른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수지에서 한가인으로, 이제훈에서 엄태웅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서 관객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주인공들의 변한 모습을 감지한다. 이용주 감독의  속내야 알 수 없지만, 건축학개론의 캐스팅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들의 변한 외양을 바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안내한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들어간 그곳에서 관객들은 외양은 변했지만 고스란히 남아있는 인물들의 정서를 발견 수 있다.



나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을까? 이제는 도둑 맞은 추억인가..


영화를 보고 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물음이 있다. 대학생 양서연은 재욱 선배와 그날 밤 어떤 일이 있었을까, 돌아온 양서연과 결혼을 앞둔 이승민의 제주도 키스신의 그 다음은 어떤 광경이었을 지에 대한 얄팍한 물음이 마음 속에서 자극점을 찾아 헤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시 십 년의 시간이 흘러서 돌아볼 때 그 답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나 싶다.


삶은 거의 모든 경우에서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나눗셈을 마치고 딱 떨어지지 못한 나머지와 같은 헤아리지 못한 변수들이 삶을 온통 둘러싸는 것만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그 변수들을 나머지라고 이름할 뿐 우리는 달리 명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어렴풋하지만 서연이 머나먼 길 돌아서 자신을 향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서연은 작은 행복, 작은 이야기를 통해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자각과 새 희망으로, 내면의 질문에 대한 해결의 방향키를 잡아가고 있다. 세상의 뭇 사람들의 소리나 조언이 아닌 자신만의 피아노와 꽃이 있는 고향집에서 자신이 진동했던 옛 감정을 알알이 느끼면서.


그렇다면 승민은 어떨까. 영화의 마지막. 그는 습작의 추억을 완전히 정리하며 결단의 걸음을 내딛고 있지만, 서연과 다르게 그는 이제서야 걸음을 떼고 있다. 그의 결정과 도전이 불안하고 위태해 보이는 것은 그의 사랑이 처음이어서 서툴렀던 것만큼 그의 걸음도 역시 온전한 의미에서의  처음이기 때문이리라.


서연과 승민은 각자가 갖고 있는 기억의 원본을 마주하며. 그리고 숱한 습작을 거쳐가며 서연의 제주집을 완성했다. 서연의 집은 완성됐지만 인생의 완성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지금도 진행 중인 생의 습작 속에서 완성을 생각하니 기함이 먼저 일어난다.

부디, 승민과 서연에게도, 그리고 나와 당신에게도 행운과 행복이 깃들기를.

마주한 아포리아를 넘어서 내딛는 우리네 결단의 걸음에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는 없기를.

어느덧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다시 보는 건축학개론에 생의 소망을 담아 본다.

ⓒ 도로잉 작가



작가 '원우씨'와 네이버 오디오클립과 유튜브에서 '영화발골채널 호우시절'을 운영 중입니다.

발길이 머물렀을 때 마음도 머물 수 있도록 영화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있어요.

걸음을 내딛어 주세요.


오디오클립 호우시절

유튜브 영화발골채널 호우시절

호우시절인스타그램


이미지 출처: 영화 건축학개론

매거진의 이전글 『트루먼, 편안함에 이르렀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