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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쿠나 May 29. 2021

『동화에 머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판 멜로 다큐』

영화, '봄날을 가다'를 읽다

밀레니엄 이후 굳이 흥신소를 거치지 않아도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일반인들도 타인의 삶을 살피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미니홈피,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때에 따라 두각을 나타내는 채널은 변해왔지만 본질적으로 그 속성은 유사하다. ‘자기 PR과 관음’, 두 가지 속성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만든 촘촘한 그물망은 사람들의 관심을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포획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촌으로, 다음에는 문장의 기록이나 관심사의 분류로, 그리고 몇 해 째 대세라 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은 화려한 사진으로 이용객의 마음을 훔친다.


시선을 사로잡는 자극적인 문장과 이미지, 팔로워와 DM 등이 인기와 관심을 상징하는 척도가 된 오늘날의 상황과 빗대어 볼 때, 허진호의 초기작 속, 두 남자 주인공은 한없이 심심하다. SNS나 모바일 메신저가 아예 없던 시대를 조망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유정원은 애초부터 해당사항이 없었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건만, 후속작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연기한 상우는 이미 도래한 밀레니엄 이건만 현대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상우의 직업은 오디오 엔지니어이다. 화려한 포장보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떠드는 입보다는 가만히 듣는 귀를 갖고 있는 사람, 이상우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사뭇 화려해 보이는 영어 표현보다 녹음기사라는 표현이 그를 보다 정확하게 수식한다.


이영애. 그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날, 상우에게 한 여자가 나타난다. 한은수.

은수는 지방 방송국의 PD이자 취재기자이자 동시에 아나운서이고 DJ이기도 하다.

일당백을 하는 여자.

그녀의 자아는 직업만큼이나 다양해서 외길 인생 상우로서는 은수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무릇 모든 안달 나게 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제 마음대로, 제 멋대로 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던가. 이해할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은수가 내뿜는 매력은 상우가 경험해보지 못한 치명적 마력으로 변해 상우의 마음에 깊은 웅덩이를 남긴다.


은수와 달리 상우는 담백하고 무해하다. 하지만 담백함과 무해함이 동시에 무지하고 또한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은수에게 빠져든 상우는, 하얀색 마음 위에 은수가 남기는 모든 말을 좀처럼 지우기 힘든 유화로 기록했다.


상우에게 사랑이란, 변할 수 없는 것,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절대적 약속이자 영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여, 은수가 칠한 물감은 진하게 상우의 마음속 웅덩이를 가득 메운다. 반면에 은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 순간의 표현이고, 현재를 상징하는 언어였다. 그녀에게 사랑은 오직 지금의 감정만 있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말에 늘상 달라붙는 배려라는 말도 상투적 표현이자 그저 그녀 자신을 위함이지 상대를 위해서 기능하지 않는다. 상우의 짐을 싸놓은 채 한마디 말도 없이 무릎 꿇은 상우를 가만히 보냈다가 무작정 다시 찾아가 진한 키스로 상우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행각이나 그 사달을 벌이고 나서 그날 밤 헤어지자고 말하는 은수의 모습 속에서 그녀에게 배려란 자신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이별의 말을 고하기 위한 과정이 은수가 할 수 있는 항변이지만 그것은 옹색하다. 은수의 배려는 상우에게 기만이 되는 것.

은수의 사전에는 ‘나보다 우선인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빨간색 머플러를 휘감고 등장한 다림, 아니 은수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않았다. 더욱 현실적으로 그냥 본래적 그녀 자체였다.

영화에서 내내 상우는 영원을 살고, 은수는 지금을 살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영원과 현재의 교차는 잠시였을 뿐인데, 그 찰나의 잠시가 마치 상우의 오디오에 녹음된 것 마냥 지독히 오래도록 상우에게는 재생된다.

봄이 가고 계절이 지나고, 이듬해의 봄이 왔을 때 즈음. 사랑의 흔적이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가 되어 재생이 끝날 즈음에 상우는 사랑의 현재성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은 공평하게 작용하여 상우에게 만이 아니라 은수도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오직 지금만을 살던 여자는 지금이 찰나가 아닐 수 있음을, 지금이라는 말의 함의가 은수의 개념보다 조금 더 길어질 수 있음을. 들어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을 이제 은수도 알게 된다. 지금이 곧 흔적이 되어 영원에 이를 수 있음을. 상우의 진심은 그렇게 조금 늦게 은수에게 흔적으로 전달된다.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는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고작 3년의 제작 시차가 있을 뿐이다. 그의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 진동했던 관객이라면 두 영화의 유사성과 다른 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봄날은 간다’는 충분히 즐겁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남자 주인공 유정원이 살던 동네의 구도, 집의 모양은 기시감을 일으킬 정도로 ‘봄날은 간다’에서도 재현된다.

영화의 도입에서 비슷한 색감과 골목길의 배치를 접할 때 얼핏 의구심이 들었다면, 관객의 의구심은 한은수가 등장하면서 더욱 선명해진다. ‘8월의 크리스마스’ 속 마지막 다림이의 모습과 동일한 의상인 검은색 코트에 붉은 머플러를 하고 있는 은수를 보면, 의심은 이제 확신으로 변한다.

여기서부터 궁금한 것은 두 작품의 연계성 보다 허진호의 의도이다. 도대체 왜 이리 노골적인 설정을 넣었을까.

8크의 다림은 봄날의 은수일까

8월의 크리스마스 ‘김다림’은 이름과 달리 기다림을 모르는 소녀였다. 타인의 상황은 생각하지 못한 채 자신의 필요에만 집중했던 다림은 정원의 사려 깊은 모습에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 간다.  영화 속 다림은 갑작스레 떠나버린 정원의 부재를 음미하고 관조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관객들은 궁금했다. 정원이 죽지 않았다면, 다림은 얼마나 더 근사해질까. 성숙해진 다림과 사려 깊은 정원이 보여주는 사랑의 앙상블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봄날은 간다’는, 허진호가 관객의 바람 섞인 질문에 답을 내놓았다고 보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전술하였던 것처럼 영화는 초반부터 다림과 은수의 모습을 겹쳐 보이게 연출한다. 은수에서 다림을 느끼고 나면 상우에게서는 정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걸랑요’라고 말하며 또래 청년들의 언어가 아닌 썰렁한 아저씨의 모습을 보여주던 정원처럼 ~~그등요’라며 어눌하게 말하는 상우의 모습에서, 거실보다는 마루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우네 집 풍경에서, 정원의 아버지와 같은 상우의 할머니의 모습에서. 상우는 마치 정원이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 같은 기시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사려 깊은 남자 정원과 소녀에서 여인이 된 다림의 현실은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동화가 아니다. 관념 속에서 형상화되는 무해함은 아름답고 티 없지만, 등을 맞대고 따라오는 반면의 무지함은 현실에서 아득한 답답함과 심심함으로 연결된다. 티 없는 순수함은 자극 없는 무미건조함으로 느껴지는 얄궂은 속성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는 발생한다.


한 없는 봄날이 계속될 것만 같았던 다림의 몇 년 후의 모습은 은수였고, 죽음 앞에서도 누군가를 배려했던 정원의 다른 모습은 순진하고 무지한 상우의 한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봄날은 간다'는 어쩌면 동화 속에만 머물고 싶은 관객들을 순식간에 현실로 빠져나오게 하는 잔혹한 멜로 다큐 일지 모른다.


상우의 할머니는 엔딩크레딧 세번째로 이름이 올라간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봄날은 간다'에서도 허진호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삶의 진리를 넌지시 알려준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이영애와 유지태 다음의 순서로 올라가는 상우의 할머니의 삶은 사랑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생의 마지막까지 선명하게 기억하는 젊은 날 서방과의 추억에 대한 하나의 단면, 반면에 늙어서 자신을 아프게 한 모습은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이면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면, 그럼에도 손주의 아픔에는 쓰다듬고 사탕을 베어 물게 하는 사랑의 단면. 이 모습은 모두 다 한 인간의 일생에서 다채로운 점도와 농도로 기록되는 사랑의 유화이다. 사랑이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 비로소 상우의 할머니는 생을 마칠 수 있던 것처럼, 삶이란 사랑의 여러 모습을 깨달아가는 과정 아닐까.


보기만 해도 기함이 날 정도로 가득한 고봉밥을 은수와 상우에게 내어주던 강화순 할머니의 말처럼 '바람 불고 눈보라 칠 때'가 좋을 수 있다는 것, 다림과 정원이 반드시 해피엔딩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랑의 역설, 아니 생의 역설을 허진호는 자신만의 분위기로 다시금 찬찬히 짚어낸다.


그래서 상우의 물음,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는 말은 비록 은수가 답하지 않아도 관객은 알 수 있다. 사랑에는 참 많은 모습이 있다고, 그리고 삶도 그런 거라고.

상우가 은수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던 것처럼, 은수가 때때로 상흔이 생겨서 팔을 심장보다 위에 올려둬야 하는 때에도 상우에게 더 이상은 연락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이란 그대로 보내줘야 하는 때가 있다. 아무리 설렜던 봄날이어도.


봄날을 보낼 수 있어야만, 다시금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 역설의 미학은 상우의 침묵과 함께 오늘도 여전히 보는 이의 마음을 휩싸고 돈다.


* 한 줄 읽기

동화 속에 머물고 싶은 관객들을 순식간에 현실로 안내하는 웰메이드 멜로 다큐


작가 '원우씨' 네이버 오디오 클립과 유튜브에서 '영화발골채널 호우시절' 운영 중입니다.

발길이 머물렀을  마음도 머물  있도록 영화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있어요.

걸음을 내딛어 주세요.


 

오디오클립 호우시절

유튜브 영화발골채널 호우시절

호우시절 인스타그램

 



이미지 출처:

사진_영화 '봄날은 간다&8월의 크리스마스'

그림_도로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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