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를 읽어내다
토드필립스 감독의 2019년작 ‘조커’는 제목 그대로, 배트맨의 안티테제인 조커의 탄생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코미디언을 꿈꾸는 아서 플렉.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사람들은 그의 조크에 웃지 않는다. 대중의 웃음과 그의 웃음의 박자가 다른 것은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아서의 입 모양은 웃고 있고, 목구멍을 타고 입술을 통해 새어 나오는 것은 분명 웃음 소리이지만 그것은 그저 소리에 그칠 뿐, 누군가를 웃게 만들지 못한다.
아서는 조커라는 포커 카드 속 광대의 그림 그대로 자신의 조크로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었지만, 고담시의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 하나 그의 조크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커녕 본인 스스로도 단 1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 사람. 아서 플렉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 그도 대중에게 웃음을 줄 때가 있는데, 그때는 그의 조크가 아닌 그의 존재에 대해 대중이 인식할 경우이다. 대중이 아서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그 존재에 대한 판단을 마쳤을 때 비로소 웃음은 잉태된다. 다만 그 웃음의 성격은 아서가 원했던 형태가 아닌, 조롱과 냉소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서플렉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에게 동등한 생명과 인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그저 비웃음과 조롱의 도구로만 소비된다.
이쯤 되면 그가 앓고 있는, 긴장된 상황에서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는 ‘감정실금’이라는 병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의 병은 군중 사이에서의 소외와 무시로 인한 서러움에서 비롯한 독보적 슬픔에서 기인한 것임을.
기실, 우리는 사회의 보편적 가치기준이라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 그것들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의 삶에는 잘 적용되지 않고 괴리 되어 있는 것을 왕왕 목격할 수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지도를 네모 반듯하게 죽죽 그어댔다. 사각형으로 구분된 아프리카의 지도는 지구본에서는 더 없이 깔끔하지만, 실제 현실로 사는 이들은 전에 없는 혼란과 혼돈의 역사를 마주 해야 했다. 고담 시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이라 이름 지어진 규칙이나 제도도 이와 마찬가지다. 상담원이 이야기 한 대로, 영화 속 아서와 같은 광대나 상담원 같은 이들에게 보편적 규칙이나 제도, 사회공급망은 삶과 유리되어 있다. 간혹 운 좋게 혜택을 보게 된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간편하게 폐지되고 말아 더욱 깊은 상실감과 공허함에 절망의 중량만 늘어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보편적 규칙이나 제도, 기준은 토마스 웨인이나 쇼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의 관념 속에만 존재한다. 이너서클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이 정서는 아서를 비롯하여 영화 속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 영화에서도 아서가 만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보편적 가치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이는 그를 버린 토마스 웨인과 동경하는 쇼의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 밖에 없다. 더구나 토마스 웨인과 머레이는 평상시 아서의 동선에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아서의 돌발행동 덕분에 예외적으로 그들의 동선에 잠시 편입했던 것 뿐, 아서가 아닌 소외된 자들은 토마스와 머레이를 좀처럼 만날 수 없다.
인간의 급을 나누는 선은 단지 하나에 불과하지 않다. 한번 나누어져 구분선으로 사용되고 나면 양 편에 자리한 사람들은 다시금 그 안에서 끊임없이 경계선 긋기를 반복한다.
거리의 왈패들은 광대에게, 광대들은 다시 정신이상자에게.
끊임없이 선을 긋고 분리하고, 이용하고 진영을 가르고, 벽을 세운다.
토드 필립스는 장쾌한 액션이나 오락물의 서스펜스 대신, 아서가 조커로 변하는 과정을 진지한 서사로 풀어내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기득권과 주류가 비주류와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들을 밀어내는 폭력의 방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아서의 동의 없이 그의 영상이 TV에 송출되고, 그의 어떤 행동도 탐탁하게 느끼지 않는 사회구성원들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단편적이고 보편적인 가치 체계가 개별적 한 인격을 무시하고 영혼을 짓밟고 있는지 영화를 보다 보면 느끼게 된다.
사회에 지나치리만치 분명한 가치 기준이 불문율처럼 정립 되어 있다면, 그 기준의 의도와 동기가 비록 선하다고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차별을 일으킨다.
분명한 기준은 끊임없이 구성원들을 분리하게 만드는 선(Line)이 되고, 그 선을 축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부자와 빈자, 우월한 자와 열패자,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강자와 약자로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낙인 찍는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승자에 속했든, 패자에 속했든 사람들은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 결국 이 분열이 극단에 이르면 기존의 기준, 즉 분명한 가치 기준은 그 처음의 의도와 상관없이 심리적 구분선으로 진리처럼 기능하며, 빈자와 패자, 그리고 약자의 무리에 속한 이들의 상처는 곪아 터져 폭력적 사회전복의 씨앗이 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유머를 던지는 자. 남을 웃게 해주고 싶었던 아서 역시 이 구분에 의해 존재의 가치를 잃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에 값을 매기지 못하는 이 슬픈 존재들은 다른 이 역시 무가치한 존재로 해석하기도 하며, 혹은 분노와 척결의 대상으로 타인을 인식하게 된다.
영화는 길거리에 수많은 광대가 쏟아져 나오는 폭동의 모습을 통해 악인의 행각에 분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악인가’를 묻고 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인간에 대한 구분이 아닌, 무엇이 인간을 극단으로 몰았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 감독이 던진 문제의식은 거기 있지 않은가 싶다.
2019년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감상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적어 내려갔다.
"내면의 약동하는 힘을 느끼며 존재의 심대성에 대해 자각할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한 생명의 소중함을 자각하지 못할 때 사람은 닿을 수 없는 관념의 기준 앞에 포로가 되어 자신을 핍박하고 상대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치부해버린다.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대할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존재는 수단이 될 수 없는 것.
존재가 수단이나 도구로 활용 되는 것은 막아야만 한다는 울림.
이 조크가 될 수 없는 메시지가 토드필립스의 조커가 내게 던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시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저 글만으로는 온전한 답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를 반영한다.
갑질과 금수저로 상징되는 지난 10년, 노동가치로는 자산가치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음을 절감하며 사는 우리의 삶에서 개인의 자각과 자성만을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운 답이었다.
경솔한 단언보다는 삶에서 두고두고 살펴볼 질문을 남겨두어야겠다.
사회는 존재를 어떻게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존중할 것인가.
다시 2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 한 줄 읽기
보고 있을 때는 연기와 연출, 극본에 놀라 입이 벌어지고,
보고 나서는 던져 온 질문에 입을 다물게 만드는 수작
작가 '원우씨'와 함께 호우시절이라는 채널로 그 시절 반짝거렸던 때를 추억하며
영화를 리뷰하고 있는 조쿠나입니다.
이번 작품은 토드필립스 감독의 2019년작 조커입니다.
조커에 대한 리뷰글은 영화를 보고 남겼던 2019년 글을 조금 윤문했습니다.
더욱 다채롭고 깊은 감상은 호우시절을 통해서 남겨뒀습니다.
두 남자의 수다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호우시절로 오세요.
그때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