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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쿠나 Feb 01. 2021

불완전한 존재가 전하는  세 음절의 위로

이터널 선샤인, 조엘의 천로역정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한 남자가 있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 같아 보이지만, 유독 흔들리는 카메라는 이 남자 조엘이 맞이하는 아침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반짝이는 햇볕이 희한하게 차갑게 느껴지는 오묘한 아침 풍경. 그 희한함은 출근길 주차장에 움푹 패여 있는 자동차를 남자가 확인하는 순간, 좋은 일탈의 구실이 된다.

모든 게 밍숭맹숭한 이 남자 조엘은 이 날 아침이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에 결국 느슨하지만 견고했던

자신만의 빗장을 풀고 몬탁으로 향한다.
몬탁. 해돋이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남자가 몬탁에 간 것은 아니다.
그가 몬탁으로 가서 확인한 건, 2년 치 그의 일기장이 찢겨 나갔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

일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남자가 갑자기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일기장을 언제 찢은 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희한할 일이지만, 기실 조엘은  그보다 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몬탁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란 머리의, 조엘 자신과는 무척 다른 분위기의 여인 클레멘타인을 만나 단숨에 사랑에 빠져버린 것 그것이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열었던 시간은, 돌이켜보면 티끌 하나 남김없이 그 전과 후가 모든 것이 바뀔 것만 같은 설렘과 불안이 혼재했던 때였다. 힙합바지는 사이버 테크노 룩으로 바뀌고, 자동차는 날아다닐 것 같은 기대감이 한 편에서는 넘실거렸고, 다른 한 편에서는 세기말 매트릭스가 던졌던 경고장처럼, 밀레니엄에는 인간의 영혼까지 부지불식간에 기계에 정복될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웅크리고 있었다.

20세기말, 매트릭스는 우리에게 존재의 진위를 물었다


그러나 막상 2000년이 문을 열자 그런 걱정과 예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도로 위의 자동차는 여전히 휘발유를 넣었고, 작년에 입었던 외투는 옷장 안에서 성실하게 주인의 손길을 기다렸다.

하지만 천지가 개벽할 변화가 없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세기말 매트릭스가 영화가 인류에게 던진 조금은 아득한 철학적 질문이었다면, 미셸 공드리의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며 영화가 인류에게 던진 보다 구체적이고 있을 법한 현실적 물음이었다.


라쿠나 사는 인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
박사 한 명에 직업윤리라고는 찾을 수 없는 테크니션 둘, 거기에 리셉션 직원 정도가 근무하는 소박한 동네 병원의 규모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더더욱 문을 열고 나가면 그들의 기술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시감에 빠지게 된다. 더도 덜도 말고, 잊고 싶은 기억만큼만 약간의 과음 수준의 충격으로 지울 수 있다는 그들의 기술은 지금을 사는 우리도 솔깃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다름이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그 이상의 강렬한 인력에 끌렸던 두 사람. 하지만 처음의 다름은 이내 서로를 지치게 했다.

조엘의 찢긴 일기장 속 2년은 클레멘타인과의 설렘과 다툼, 권태의 기록이었다. 클레멘타인은 더 이상 견뎌낼 힘이 없어서 라쿠나를 찾았고, 클레멘타인의 결정에 대한 괘씸함에 조엘마저 기억을 지운다. 그렇게 그들의 2년은 사라진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완벽할 수 없는 것은 인간 자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엘이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는 점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라쿠나의 확신과 달리 조엘이 망각의 바다에서 깨어나는 것을 통해 기계의 불완전성도 증명된다. 불완전한 양자는, 한쪽에서는 의지를 갖고 망각의 공격을, 다른 한쪽은 사라지는 기억을 지키려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다. 이 와중에 조엘은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웅덩이를 마주하게 된다.

불완전한 인간의 결정에는 늘 후회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스스로를 완전히 알 수 없는 존재의 한계 때문에 섣부르게, 홧김에 한 결정은 높은 확률로 다시금 뒤돌아보 만든다.

조엘은 자신의 마음속에 어느 만큼 클레멘타인이 스며있는지 알지 못했고, 클레멘타인은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조엘의 기억을 떼어냈지만, 그 기억이 곧 자신의 존재였음은 미처 알지 못했다. 라쿠나의 리셉션 직원 메리는 박사 하워드를 흠모했기에 그와 그의 기술을 맹신하고 자랑했지만, 정작 자신 역시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 앞에서 스스로 읊었던 니체의 명언 구와는 대척점에 서게 된다. 결국 하워드의 가장 반대편에서 라쿠나의 치부를 폭로 정도로.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폭넓은 진폭으로 여러 화두를 던지고 있다.
‘과연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모든 기억이 사라져도 서로를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낭만적 물음부터, 제법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기술 진보의 윤리성’, 그리고 ‘인간이 기술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인간 스스로에 대한 회고와 담론’까지, 영화를 보고 나면 고민하게 된다.

모든 기억이 소멸된 상태에서도 ‘몬탁으로 오라’는 울림이 남아 어느 날 갑자기 삶의 궤도를 떠나는 조엘의 모습은 관객을 조금이나마 마음 편하게 한다. 하지만 로맨스 너머 남아있는 영화의 질문은 그리 간단히 답할 수가 없다.

영화의 원제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에서 이터널 선샤인이 만약 기억을 지우는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인류는 그래도 그리 멀지 않은 빛의 여정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spotless mind라는 뒷문장이 마음을 잡는다.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한 마음.
영화의 제목이 되는 시를 쓴 알렉산더 포프에게도 그것은 불가능의 영역이었고, 세기말에도, 공드리의 시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터널 선샤인 이후 다시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간에게 있어 불가능이란, 어쩌면 영원한 광명에 도달하는 것보다 티끌 하나 없이 순전하게 내 마음 밭을 관리하는 것일지 모른다.


허나 티끌 하나 없는 마음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조엘의 마지막 말에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한다.

‘괜찮다고.’ ‘오케이’라는 짧은 세 음절이 느슨하지만 견고했던 마음의 빗장을 이내 풀어제낀다.

불완전한 존재의 몸뚱이를 험난한 세상에 다시금 내어 던질 수 있는 힘은, 기술이나 윤리의 완벽한 주동 일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아무 조건 없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의 거리낌 없는 내어줌이, 차갑지만 환하게 볕이 비추고 있는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준다.

비록 가는 길이 조금 춥고, 몸이 조금 쭈뼛거릴지라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가 있어 다시금 걸음을 내딛는다.


네이버 오디오 클립과 유튜브에서 영화채널을 운영 중입니다.

이번에는 이터널 선샤인을 발골 중입니다.

조쿠나와 원우씨의 영화 발골 채널 호우시절.

많이 사랑해주세요.


영화 발골 채널 '호우시절' : 오디오 클립

영화 발골 채널 '호우시절' : 유튜브

@howoos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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