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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광 Oct 28. 2022

감나무와 친구들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지는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산책이라도 할 겸 한적한 산길을 걷다 보니 두 볼에 닿는 바람이 상큼하다. 뜨거움을 덜어낸 적당한 햇살도 내 마음에 맞춤하듯 밝게 빛난다. 몸도 마음도 가벼운 하루다. 길모퉁이를 돌아가는데 풀섶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찬 바람이 불면 저들도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맹렬하게 울어댄다. 더 머물고 싶지만 등을 떠미는 바람이 야속한 듯 소리의 마디마다 쓸쓸함이 배어있다. 눈에 띄지 않는 미물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그렇게 울어대는 것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하면 산다는 것이 가끔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을이 깊어가니 근심도 깊어진다. 걷다가 멈추고 다시 뒤돌아보면 나는 너무 멀리 와 있고 처음 걸어온 그곳은 너무 흐릿해져 있다. 매번 허둥지둥 쫓기듯 살다 보니 무엇 하나 보란 듯이 이루어 놓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긴 세월을 쉬지 않고 반복하며 지나왔으면 사는 일에도 익숙해지고 자신감도 생겨날 법도 한데 아직도 나는 서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인지 모른다. 내게 주어졌던 시간들을 너무 헛되이 보낸 것 같아 뒤늦은 후회가 일어난다.

그러나 불어오는 가을 바람이 괜찮다고 너무 염려하지 말라며 속상해하는 나를 토닥거려 준다.

      

집으로 향하는 길가에 있는 감나무밭에는 가지가 꺾일 만큼 많은 감이 열려있다. 한 가지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열매를 열 수 있는지 저들을 키워내는 땅의 힘과 자연의 생명력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잔가지마다 빈틈없이 매달려있는 감을 보니 불현듯 교실 창문 밖으로 일제히 얼굴을 내밀며 소리치는 아이들 모습이 떠오른다. 나를 향하는 듯한 환호성을 뒤에 두고 차마 앞으로 발길이 옮겨지지 않는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가가 보니 그곳에 또한 새로운 풍경이 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이 보란 듯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로 인해 주위가 얼마나 밝아지는 것인지 볼 수록 설레고 뜨거워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감나무밭 안쪽에서는 여기저기 먹이를 탐하는 새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 투명한 하늘을 가르듯 유유히 멀어지는 소리, 건너편 집 마당에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까지 섞이며 산촌의 하루를 노래한다. 언덕 아래 작은 골목을 마주하며 서 있는 낡은 집 담장에도 그들에 화답하듯 감이 풍성하다. 떫고 쓰고 아렸던 시간들이 농익어 달달한 맛을 내는   가을이다. 그들 속에서 오래전의 기억들이 꿈틀거리고 나는 줄곧 잊고 살았던 고향에 돌아온 듯하다. 아아! 그 때 우리집 감나무에도 저렇게 많은 감이 열렸다면 나와 내 친구들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    

 

옛날 우리집 텃밭에는 오래된 감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었는데 가을이면 가지마다 주렁주렁 감을 열었다. 집이 언덕 위에 있는 탓에 마을 어디서든 훤히 감이 반짝이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높은 가지에 매달려있는 노란 감들이 불을 밝힌 전등처럼 빛나면 그것을 쳐다보는 배고픈 내 친구들 마음 속에도 밝은 불이 켜지곤 했다. 우리 집의 풍경임에도 친구들은 마치 저들의 것인 양 즐거워했고 누구보다 감이 빨리 익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감은 그들의 생각보다 더디게 익었고 내 친구들은 언제쯤이면 먹을 수 있는지 조바심을 내며 내게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속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익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말로 그들의 기대를 허물곤 했다. 그러나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은 수시로 우리 집 대문 밖에 다가와 서성거렸다. “와! 저기 봐라, 저건 벌써 다 익은 것 같은데..,...“ 감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던 그들의 눈길은 잠시 나를 향했지만 가까운 곳의 아버지를 발견하자 말없이 발길을 돌리곤 했다. 나는 그들이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빈번하게 우리 집을 드나들거나 부모님의 허락 없이 감을 따가는 것이 싫었지만 그들의 가난한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언제까지 안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우리 집으로 떼를 지어 몰려왔고 그들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 날쌘 동작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나무는 높았지만 가볍게 가지를 옮겨 다니며 저들끼리 수군거리거나 가지에 걸터앉아 허겁지겁 감을 먹는 광경은 영락없는 새의 모습이었다. 나도 종종 입장이 바뀌어 가끔 친구네 집 주변을 맴돌며 주인 몰래 슬쩍 하는, 날 것 그대로의 생활을 즐기곤 했다. 그들과 함께 하는 날이면 아주 사소한 일조차 큰 즐거움으로 돌아왔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곤 했다.    

 

아버지는 감을 거두어들일 때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과 작은 나무에 있는 것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은 새들의 몫이었고 작은 나무의 것은 항상 밖을 기웃거리는 내 친구들을 위한 것이었다. 새들은 그렇게 구분해놓은 이유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서 재잘거렸고 친구들도 우리 집을 마음 놓고 드나들며 배고픔을 해결하곤 했다.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었고 어떻게든 견디어 내야 하는 큰 일이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을 사람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등을 내어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풍성했던 감이 사라진 나무는 죽은 것처럼 어둡고 황량해 보였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감들은 아버지의 마음인 양 우리에게 넉넉함을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가 머물렀던 감나무밭이 어른거린다. 나무 아래에서 감이 익었는지 묻기도 하고 새들처럼 나무를 옮겨 다니던 친구들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가난했지만 결코 주눅들지 않고 씩씩하게 산과 들을 누볐던 우리에게 가을은 무한한 자유였고 넓은 세상을 꿈꾸는 무대이기도 했다. 지금도 자연을 벗하며 산다거나 귀향하여 사는 친구들이 많은 것도 어린 시절의 삶이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 가끔씩 전화로 친구들의 안부를 묻곤 하는데 목소리만으로도 생생한 그 시절이 묻어나온다. 세월이 흐를수록 향기를 더하는 포도주처럼 나에게 오래 묵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세상을 크게 헛되이 살아온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조금 위안이 된다. 가끔 세상이 막혀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릴 적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도 새들처럼 자유로워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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