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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광 Nov 19. 2022

11월의 나무들

아직도 아름다움이 남아있는 계절

     

 앞마당에있는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몸집이 작아지고 있다. 여러날 곡기를 끊은 듯 마르고 수척한 모습이다. 예전에는 무성한 잎에 가려 건너편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훤히 드러나 보인다.  가지에서는  어제보다 더 많은 잎이 떨어졌고 잎은 조금 더 말라있다. 가을 햇살이 내리자 그들은 떠나기에 앞서 내 모습을 잘 기억해두라는 듯 밝게 빛난다.  등 뒤에서 가끔씩 나를 부르듯 툭툭 낙엽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 아래에는 이미 한 해의 허물을 벗어 놓은 듯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벚나무와 느티나무, 백합나무는 벌써 모든 잎을 떨구었다. 작은 바람결에도 흩날리는 낙엽에서 이제 한 계절이 떠나감을 읽는다. 먼저 움을 틔우거나 일찍 꽃을 피웠던 나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둘러 잎을 떨구었다.  가지에 있을 때는 다가갈 수 없었던 잎들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한데 뒤엉키며 몸을 비벼댄다. 세상에 살면서 만나고 싶고 안기고 싶었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일까? 길 위에서 갈 곳조차 모르고 구르는 낙엽이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아직도 할 일을 다하지 못해 쓸쓸해지는 마음 탓일 것이다.


늦가을은 서서히 음지가 빛을 발하는 계절이다. 잎이 진 자리에는 오랫동안 잎에 가려져있던 잔가지들이 속속 드러난다. 큰 가지가 작은 가지를 낳고 다시 다른 가지로 이어지는 나무의 거대한 흐름이 보인다. 가지마다 다다르고자 했던 곳, 더 멀리 가고자 했던 욕망도 숨김없이 드러난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지만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낸 잔가지들의 풍경은 더 힘차게 살아보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진다. 빈 가지 위로는 여전히 새들이 쉬어가고 지나는 바람도 훤히 뚫린 가지의 틈새로  수월하게 빠져나간다.  


집사람은 가을을 더 오래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인지 낙엽을 쓸지 말라며 당부하듯 말하지만 길 위에서 오래 눌리고 누추해진 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모습을 참아내기 어렵다. 쓱쓱 낙엽을 쓸어내는 긴 대빗자루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낙엽의 더미가 사라진 자리는 이내 새롭게 떨어진 잎들의 차지가 된다. 말끔하게 쓸어진 마당에 방금 내려앉은 잎들을 보니 마음이 한층 개운해진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마당을 쓰는 이유는 몸도 마음도 가벼운 채로 하루를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낙엽을 쓸어내는 순간만큼은 온갖 잡념들이 사라지고 흐트러져있던 마음이 바르게 펴진다.

서울을 내던지고 귀촌해 살아온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지금도 내 앞에 있는 나무들이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들은 어느새 내 삶으로 들어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거나 가끔씩 처져있는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한다. 나무는 자연을 괴롭혀온 세상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산다. 나무가 가고자하는 길은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의 반대편에 서있는 듯 보인다. 나무가 서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삶은 복잡해지고 소란스러워지는 ......   생각만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사람의 삶에 비해  나무들의 삶이란 지극히 단순하고 간결하다.  그런 단순함이야말로 세상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그들의 힘이며 아름다움이다.


인디언의 아라파호족은 11월은 모든 게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했다. 겨울을 목전에 두고 있어 아름다운 풍경이 조금씩 사라져 가지만 여전히 자연은 아름답다. 산마다 내려앉은 갈색 풍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넉넉해진다. 단풍은 자연이 품은 또 다른 꽃이며 새싹이 꿈꾸는 미래이기도 하다. 시퍼렇게 살아 숨쉬던 청춘은 떠나갔지만 11월의 자연에는 중년의 은은한 멋이 있다. 푸른 잎이 단풍으로 물들고 낙엽이 되는 변화가 커다란 풍경으로 다가온다. 내 안의 욕심을 줄이며 가진 것들을 점차 버리는 것에서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한다. 그동안 눈에 띄지않던 것도 새롭게 보이고 지금까지 너무 쓸데없는 것들에 갇혀 살았던 날들도 아프게 다가선다. 당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향해 가야 할 것인지 큰 눈으로 살펴보고 싶은 마음도 강해진다.   

언젠가 소설가 박완서 씨가 쓴 노년을 예찬하는 글이 생각난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한 겹 두 겹 책임을 벗고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앞산을 넘어오는 부드러워진 바람이며 선명한 햇살이 내리면 누군가를 미워했던 마음이나 평소 속상해 했던 것들이 사라지는 듯하다. 11월은 밀쳐놓았던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목적 없이 거닐기에도 좋은 달이다. 내 앞으로 시간이 어떻게 오고 가는지, 계절은 또 어떻게 나를 바꾸어 줄 것인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나이가 들 수록 앞서서 계절을 느끼는 푸른 삶을 살고 싶다. 다소 서툴고 느리더라도 자연이 가는 길을 기억하며 느긋하게 따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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