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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광 Apr 13. 2024

할머니의 봄

    

읍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 너머로 희뿌연 안개에 가려진 백운산의 모습이 아스라하다. 우뚝 솟은 형제봉 뒤로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구례가 있고 백운산은 그곳에서 불어오는 거센 강바람과 산바람을 막아준다. 우리 동네가 사계절 따사롭고 평화로운 이유도 높은 산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산이 강한 바람을 막아주듯 평소 존재감이 보이지 않거나 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내 인생에 선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세상에는 내가 모르고 지내는 일도 많고 감사해야 할 일도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간혹 읍내를 나갈 때나 집으로 돌아올 때 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언제나 산길을 따라 적당한 속도로 나아가는 버스를 타면 일상의 조급한 마음이 사라지고 대신 느긋한 시간이 따라온다. 버스의 차창 너머로 승용차를 몰고 갈 때 보이지 않는 것들, 가령 높은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능선을 끝까지 따라가 본다거나 호수에 반짝이는 윤슬이 얼마나 눈부신지 한참 동안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 순간만큼은 내가 흐르는 시간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도 한다.

   

마침 장날이어서인지 돌아오는 차 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넘쳐났다. 지루했던 겨울을 털어내고 봄볕을 쬐고 싶었던지 모처럼의 나들이에 한껏 상기된 표정이었다. 장터에서 마신 술기운에 얼굴빛이 불콰해진 할아버지들 몇몇의 손에는 저마다 작은 묘목들이 있었고 할머니들의 묵직한 봉지에는 새싹들이 숨어있었다. 인생의 황혼길을 걸어가는 노인들과 그들 품에 안긴 어린 묘목과 새싹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새싹들을 보면 반갑고  보듬어주고 싶은 것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 때문인 걸까?

할머니가 바닥에 내려놓은 검은 봉지 사이로 철 모르는 새싹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작은 플라스틱 묘판에는 상추며 쑥갓, 부추, 치커리들이 오밀조밀 맞대며 차와 함께 흔들렸다. 아직 찬 바람을 쐬기에는 조심스러워 보였지만 그들도 창을 타고 전해오는 따뜻한 봄기운에 설레는 듯 보였다.      

버스는 묵묵히 산굽이를 돌아나가고 여러 마을을 스쳐나갔다. 감나무밭이 있는가 하면 매화를 가득 품은 밭이 보였고 키작은 다락논과 넓은 밭이 펼쳐지기도 했다. 마을마다 드러낸 땅의 모습은 비록 달랐지만 자식을 품에 안듯 듬직한 모습을 드러냈다. 해마다 다양한 곡식과 과일을 키웠고 사람들을 살아갈 수 있게 했덩 근원지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하며 거친 세월을 이겨내었는지 차근차근 말해주는 듯했다. 버스가 멈추면 사람들은 익숙하게 정류장에 내렸고 하루를 끝내듯 골짜기 집을 향해 돌아갔다. 그들 누구에게나 어제같은 오늘이 오늘같은 내일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언덕 아래 텃밭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땅에는 성급한 잡초들로 푸릇푸릇했다. 잡초는 누가 반기지 않아도 먼저 자리를 잡는 넉살 좋은 친구였고 어떤 새싹보다 끈질기고 강했다. 그래서 흔히 농사는 잡초들과의 전쟁으로 불렸고  매번 땡볕을 참아가며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했다. 

집 옆에로 큰 밭이 아직 빈 채로 있었다. 젊은 날 당신의 눈물과 땀을 흠뻑 적시게 했고  네 자식들 모두 보란 듯이 키워낸 장한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고 손바닥만 한 텃밭이 당신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작심한 듯 호미를 들었다. 단단한 흙이 호미 날 끝에서 서걱거리며 갈라질 때마다 손에 닿는 촉감이 묵직했다. 미운 잡초를 뽑으니 성가신 것들을 말끔히 치운 것처럼 개운했다.

 잘 다듬어진 골로 어린 새싹들을 하나하나 옮기고 주변의 흙을 끌어모아 주위를 꼭꼭 눌러주었다. 당신의 손끝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나는 새싹들을 보니 일 무서운 줄 모르고 지냈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당신에게도 사랑스럽고 보람 가득했던 때가 있었나 싶었다. 당신이 흘린 땀의 결과로 질서 정연한 새싹들이 한눈에 쏙쏙 들어왔다.


적막했던 집안에 새 식구가 생겼으니 낮은 언덕에 등을 기댄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가끔 당신의 품을 떠나간 자식들이 생각날 때면 텃밭에서 잡초를  뽑아주거나 불쑥 자란 새싹을 향해 많이 컸다며 칭찬도 늘어놓을 것이다. 이제 종종 텃밭이 내려다보이는 툇마루에 기대어 앉아 꾸벅꾸벅 졸며 봄볕을 즐기기에도 좋고 서산에 지는 노을을 행복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가진 것 없어 보이지만 이미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기에 당신의 노년이 몹시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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