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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21. 2023

나는 코로나 블루를 이렇게 이겨냈다 I

아뿔싸!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남편은 코로나 고위험군이다!!!

왜냐면 대사증후군으로 인한 기저질환자이기 때문이다.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약을 먹기 시작한 지는 수십 년이 되었다.

결혼 전만 해도 허리 32인치를 유지하던 남편이었는데 결혼 후 임신으로 인해 내 배가 불러옴과 동시에 남편의 배도 함께 불러오기 시작했다.

남편의 변명인즉슨 아내가 임신했을 때 아내와 같은 신체적 증상을 겪는 쿠바드 증후군(couvade症候群)이란다.


"당신이 임신을 해서 배가 나온 것처럼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내 배도 똑같이 불러온 거야.  당신이 출산을 하면 내 배도 들어갈 거야." 

라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쿠바드 증후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물론 나는 처음부터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개뿔~!!! 쿠바드 증후군은 무슨~ 복부비만이지!"

임신과 출산을 거듭하며 내 배는 불렀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사이에 남편의 배는 30년의 세월 동안 여전히, 꾸준하게, 변함없이 만삭 임산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사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살듯이 남편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는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딱히 다이어트를 고민하지도, 시도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입이 닳도록 건강을 위해 남편에게 다이어트를 권유해 본 적도 많았지만 시도하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의 권유는 아무리 좋은 의미일지라도 귀에 거슬리는 잔소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좋은 꽃노래도 세 번 들으면 지겨운 데 하물며 "제발 건강을 생각해서 뱃살 좀 빼!!!"는 잔소리는 오죽하랴 싶어서 더 이상 남편의 다이어트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는다.

내 입만 아프다.



복부비만과 고혈압, 당뇨뿐만 아니라 고지혈증 등 다양한 대사증후군의 위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굳이 코로나가 아니어도 건강에 적신호는 진즉부터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코로나 19가 시작되면서 한층 심각해졌다.

남편은 코로나 고위험군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혹여나 코로나 감염으로 인해 본인보다 아빠이자 남편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전전긍긍했고, 그야말로 살엄음 위를 걷듯이 조심 또 조심했다.


나는 코로나로 인해 모든 강의가 비대면으로 전환되어 밖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어서 남편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생활반경은 집안으로 제한되었다.


때로는 바람도 쐬고, 문화생활도 하고, 지인들과의 만남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을 위해 가급적 자제하며 엔데믹 이후로 미뤘다.

업무상 피치 못할 외출 이외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에서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스멀스멀 우울이란 놈이 나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갱년기 증상으로 우울증을 겪으면서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는데 코로나 블루까지 겹치고 보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나의 이성적인 논리로 저 밑바닥 끝까지 밀려갔던 우울이란 놈이 코로나 블루로 스멀스멀 올라와서 나를 지배하려고 틈틈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은 사소한 일로 죽고 싶다는 우울감에 휩싸여 손가락도 까딱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기력하게 있다가 강의 일정이 잡히면 강의를 준비하면서 잘해야 한다는 의지가 활활 불타올라 순식간에 살아낼 가치가 있는 날로 바뀌었다.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나는 하루하루 힘겹게 코로나를 보내고 있었다.


아뿔싸~!!!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러다 결국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토록 온 가족이 슬기롭게 코로나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었는데 막판에 가장 조심해야 할 남편이 덜컥 코로나에 걸려 버렸다.

바로 이어서 작은 아들까지 아빠로 인해 코로나에 걸렸다.


그런데 코로나 감염에 따른 결과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반전이었다.

작은 아들은 꼬박 일주일 동안 고생을 하고 회복이 된 반면에 기저질환을 가져서 그토록 염려하고 걱정하던 남편은 3일 만에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이제 증상이 없으니까 약 그만 먹을래."

"무슨 소리야. 증상이 없어도 처방받은 약은 끝까지 먹어야 된대."


약을 그만 먹겠다는 남편에게 오히려 내가 우겨서 7일 동안 약을 복용했을 정도로 비교적 증상이 가벼웠다.

남편의 코로나 감염으로 나는 양가감정에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고위험군이었음에도 큰 증상 없이 잘 넘겨줘서 너무너무 다행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간의 우리 가족의 노력들에 대해 '굳이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허탈함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나는 도대체 누굴 위해,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자청해서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했던 거지?

나는 모든 만남이나 모임을 최소한으로 하고, 꼭 참석해야 할 경우에도 끝까지 나 홀로 마스크를 고집했었는데 너무 허무하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의 지나친 나의 노력 때문에 허탈해 우울에 빠졌다.

그리고 따로 사는 큰 아들을 제외하고 동거인 중 마지막으로 나까지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남편과 작은 아들이 코로나 격리가 해제될 즈음 뒤늦게 나에게도 증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나는 두 사람보다 증상과 고통이 훨씬 더 심했다.

오한, 인후통, 두통, 콧물, 기침, 가래 등 온갖 증상이 나타났다. 의사 선생님도 모든 증상이 다 나타났다고 놀랬다. 

너무 심해서 밤낮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지긋지긋한 부정출혈증상까지 나타났으니 그곳이 나의 가장 약한 포인트인가 보다.


일주일 안에 툭툭 털고 일어난 두 사람과는 다르게 나는 한 번의 처방만으로는 증상이 없어지지 않아서 두 번이나 병원에 가야 했고, 부정출혈 때문에 산부인과까지 가야 했다.

산부인과 의사는 코로나로 부정출혈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한다.

한 달가량 죽도록 고생을 했고, 신체적인 증상은 차츰차츰 없어졌지만 신체적인 증상이 마음의 증상으로 옮겨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굳이 하고 싶지도 않았다.

먹고 싶지도 않았고, 미각을 잃어서 먹을 수도 없었다.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지만 정작 TV는 보지도 않고 멍한 눈으로 바라만 봤다.

죽도록 아프면서 한 달, 무기력하게 죽음을 생각하며 한 달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일단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작은 노력으로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일, 그로 인해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나에게 그런 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에 친정엄마를 닮아 손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기왕이면 손으로 만드는 일이어야 했고, 복잡하거나 어려워 머리를 많이 쓴다거나 한 가지의 일로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는 일이어야 했다.

즉 아주 짧은 시간에 눈에 띄는 결과물을 완성할 수 있는 일이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수세미 뜨기였다.


자기 효능감을 올리자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고 알록달록한 수세미실을 라면상자보다 훨씬 더 큰 박스로 주문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코바늘을 잡고 수세미를 떴고, 저녁에 잠이 들기 전까지 수세미 만드는 일을 했다. 수세미 만드는 일 이외의 모든 일은 최소한으로 했다.


한 박스의 실은 금방 동이 났고 나는 처음 주문한 것보다 두 배 정도 큰 박스로 수세미 실을 다시 주문했다.

그리고 또 수세미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떠야 할 이유가 생겼고, 하루종일 무기력한 모습이 아닌 작품을 만든다는 의욕이 생겼다.

원하는 색상의 실이 떨어지면 다시 구입을 해서 채웠다.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었고, 라면상자 네 상자 이상의 실을 샀던 것 같다.


우울할 때는 하루종일 내가 머물던 공간이 침대 위였다면 수세미를 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소파밑이 하루종일 머무는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이 되면서 알록달록한 수세미는 점점 쌓여갔다.

모양별로 박스에 차곡차곡 담겨 있는 수세미를 보면서 성취감이 생겼고 나의 우울과 무기력을 다시 저 밑으로 내려보냈다.


가까운 지인을 만날 때면 수세미를 선물로 주었고, 나의 손재주를 인정받을 수 있어서 뿌듯했다.

덕분에 팔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고 나는 대여섯 박스에 쌓여 있는 수세미를 원하는 사람에게 팔기도 했다.

우울과 무기력함 대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조금의 노력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수세미를 뜸으로써 성취감과 만족감, 소량의 용돈까지 손에 쥘 수 있었다.   

            

지금은 지하로 밀려난 우울이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나를 지배할 것이다.

우울은 마음의 감기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독감 예방 주사를 맞았다고, 감기에 한 번 걸렸다고 다시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울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지금은 밑바닥으로 밀려갔지만 호시탐탐 내가 부정적인 생활환경에 노출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시 치고 올라올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시로 나를 돌아보고 우울에게 빈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과정을 살펴봤다면 '나는 코로나 블루를 이렇게 이겨냈다 II'편에서는 우울증에 걸리는 원인, 우울증에 잘 걸리는 유형,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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