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해서 정말 미안해
"엄마, 갑자기 누가 내 머리의 전원 콘센트를 확~뽑아 버리는 것 같아요."
작은 아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야?"
"아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위치가 저절로 꺼지는 느낌이라고요.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절대 잠을 자면 안 되는 상황에서도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어요.
자지 않으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어요.
몸을 꼬집어보기도 하고, 뺨을 때려보기도 하고, 찬물로 세수도 해 보고, 서서 공부하기도 하고, 심지어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를 해 봤는데 내 의지로는 도저히 졸음이 조절 안 돼요.
마치 누가 내 머리와 연결된 플러그를 뽑아 버리는 것 같아요.
나는 그동안 내가 잠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의지가 약해서 그런가 보다.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집중력이 없어서 그런 가보다 생각했어요.
이제껏 나는 공부와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아무래도 기면증인 것 같은데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들의 말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혹시나? 에이~ 아니야, 아닐 거야' 하며 묻어뒀던 '기면증'이라는 단어가 7~8년 만에 드디어 수면 위로 쑤욱하고 올라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혹시 기면증이 아닐까?' 의심만 하고 설마설마하며 차일피일 검사를 하지 않았었는데 결국은 여기까지 와버렸다.
진즉에 검사를 해 볼걸 '다음에, 내일 하지 뭐. 다음 주에 하자. 방학 때 하자.' 하며 뒤로 미루기만 했던 그동안 나의 게으름을 후회하고 후회했다.
나로서는 무엇보다 당사자가 아니니 그 심각성을 인지하기가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7~8년 동안 기면증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얼마나 자존감이 떨어졌을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고 나의 게으름으로 인한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면증 검사는 어떻게?
우리는 즉시 수면 클리닉에 예약을 하고 1박 2일 동안 입원을 하여 야간수면의 질 평가를 위한 수면 다원검사, 낮동안의 졸음평가를 위한 다중수면잠복기 검사를 통해 아이의 정확한 수면패턴을 검사했다.
결과는 우리 예상을 뛰어넘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우리 작은 아이는 상대적으로 정도가 심한 기면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밤새도록 잤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이 되면 자고 또 자고, 공부 하나 싶어서 보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구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 아빠는
'잠이 많다. 그렇게 게을러서 장차 무슨 일을 하겠냐. 자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지. 의지가 박약하다.' 하며 온갖 잔소리로 구박을 하고 미워했었다.
기면증 진단을 받고 나 스스로도 머리를 쥐어박고 싶을 만큼 미안하고 후회했지만 온갖 구박으로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혔던 아이 아빠는 몇 날 며칠을 충격에 빠져 그동안의 본인 행동을 반성하고 미안해했었다.
잠으로 인한 아이와 아빠와의 갈등에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고생을 하고 산 세월이 족히 7~8년은 된 것 같다.
진즉에 진단을 받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고등학교 때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좀 더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했고 자책을 하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우리 작은 아이가 앓고 있는 기면증(Narcolepsy)은 우리 몸을 깨어 있게 만드는 뇌각성 호르몬인 하이포크레틴(Hypocretin)의 생성이 불안전하거나 줄어드는 경우에 나타나는 장애이다.
기면증 증상은?
기면증의 증상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심각했다.
첫 번 째 저녁에 충분히 잠을 자도 낮에 누가 전원 스위치를 내려버리는 것처럼 잠에 빠져들게 된다. 길을 걷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우리 아들은 군대에서 사격 훈련을 할 때도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 들어서 꾸벅꾸벅 졸았단다.
총기를 다루는 훈련이기 때문에 혹시 총기사고라도 생길까 봐 잔뜩 신경이 예민해진 교관들에게 아이의 모습은 어이없고 기가 막힌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 혼이 났다고 했다.
두 번째 증상으로는 흥분을 했을 때 근육이나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탈력발작이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우리 아이의 경우에는 중학교 친구 중에 유독 재미있는 얘기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얘기를 할 때마다 웃겨서 배꼽 잡고 웃다가 번번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고 했다.
이미 기면증 증상은 중학교 때부터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증상으로는 진짜인 것처럼 생생한 가위눌림 증상이 나타난다.
우리 아이도 자다가 깨서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다가 무서워서 일층으로 내려와서 무서운 꿈을 꿨다고 자주 호소했었다.
네 번째 증상은 잠이 든 뒤 각성에서 수면, 수면에서 각성으로 전환될 때 환각증상이 나타나는데 굉장히 무서워한다.
우리 아이 역시 하루도 빠짐없이 자다가 무서운 꿈을 꿨는데 다시 눈 감으면 또 이어서 꿈을 꿀까 봐 한참을 잠에 들지 못한 적이 많았다.
기면증은 청소년기나 성인초기에 증상이 나타난다.
사춘기나 청소년기에는 뇌에서 도파민을 비롯하여 다양한 호르몬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로 인해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변화가 심하며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중2병 증상들이 나타난다.
전두엽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뇌를 각성시키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에는 기면증이 아니더라도 잠이 많아지고 멍 때리는 증상도 나타난다.
그런데 기면증의 발병 원인이 청소년 시기에 하이포크레틴이라는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발생한다고 한다.
주로 내가 하는 강의 주제 중 일부가 청소년시기에 발생하는 학교 폭력, 스마트폰 게임 중독, 중2병 등 각종 문제점들에는 뇌의 호르몬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강조해서 강의를 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더니 이번 기회를 통해 뇌와 호르몬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내가 미처 모르는 것들이 무궁무진함을 깨달았고, 역시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으니 아이에게 미안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해 줘서 고맙기도 하다.
부모교육을 하는 나로서는 우리 아이가 하나의 생생한 사례가 된 셈이다.
큰 아이도, 작은 아이도 나에게 무한한 강의 소재를 제공하고 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대부분 한참 공부를 해야 할 청소년 시기에 기면증의 증상이 발병하니 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의지가 부족하고, 게으르며 잠이 많다고 오해를 해 아이를 구박하고 혼낼 수가 있다.
그런데 실상은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 아이는 억울하기 짝이 없어 이로 인해 부모자녀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이는 아이대로 무기력하고 뭘 해도 안 된다는 자포자기상태가 되어 자존감과 자기 효능성이 떨어진다.
또 부모는 공부하는 줄 알았더니 툭하면 잠을 자서 저러다가는 빌어먹기 딱 알맞다고 오해를 할 수가 있다
진즉에 진단을 받았다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채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좌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아이는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곧잘 해서 우리의 자랑이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에는 너무 많은 상을 받으러 교단에 오르락내리락거려서 다른 학부모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기면증의 증상이 나타나서, 아니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서서히 증상이 발현되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본격적인 증상이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나타나서 성적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이의 바른 학교생활과 높은 성적으로 인해 우리 가족의 자존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한껏 치솟아 올랐다가 졸지에 지하 100층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우리는 천국에서 추방된 타락천사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아이의 잠으로 인한 게으름으로 단정 짓고, 아빠는 기대했던 만큼 실망을 했고 야단을 쳤다.
아이는 아이대로 좌절을 했던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병역과 관련하여 혜택을 받을 수도 있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절하듯이 졸다가 군대 선임에게 까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래저래 많이 미안하다.
기면증의 치료는?
기면증의 치료로는 다행히 각성제를 복용함으로써 증상은 드라마틱하게 호전이 된다.
어쩌다 약 먹는 것을 잊어버린 날이 있었는데 "혹시 약효가 다 한 것이 아닌가? 이제 약발이 다 떨어진 것이 아닌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루종일 불안하고 우울했었는데 집에 와보니 책상 위에 먹으려고 꺼내둔 약이 그대로 있어서 안심이 되더란다.
즉 약을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의 효과는 그만큼 천지 차이란 얘기다.
최근 사용되는 각성제는 효과적이고, 부작용이 적어 안전한 편이라 장기간 복용해도 된다고 하니 한 시름 놓인다.
우리 아이를 봐도 아침에 약을 먹고 점심때 이후에는 다시 기면증 증세가 나타나서 오후에 다시 약을 먹어야 한다.
그만큼 약성분이 몸에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몸 밖으로 배출이 돼서 안전하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우리 아이는 날마다 치료약을 먹고 드라마틱한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뿌였던 머릿속이 맑아졌고 매일 잠과의 싸움으로 힘들어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행복해한다.
또한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고 잠이 많다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자책감에 시달렸고, 공부를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고 매일 졸아서 나는 할 수 없다는 자기 효능감이 떨어져서 자존감이 하락했었는데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이 회복이 되었다.
졸려서 공부를 하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졸음 증상이 없으니 집중을 잘할 수 있다고 좋아한다.
향후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호르몬 조절이 된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리며 귀찮더라도 매일매일 약을 먹으며 치료를 하고 있다.
혹시 내 아이가 잠을 자도 자도 졸리고, 잠꼬대를 자주 하고, 가위에 눌리고, 흥분하면 온몸에 힘이 빠지는 증상이 보인다면 기면증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아이처럼 모든 증상이 다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중 한 두 가지 증상만 나타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유전적인 요인도 있다고 한다.
만약 내 아이가 그렇다면 누굴 닮아 저렇게 게으르냐고 내 탓을 하거나 배우자 탓을 하기보다 빨리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기를 권한다.
공부도 때가 있다고 한다. 많은 부모님이 우리 아이처럼 때를 놓쳐서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면증이 전에는 보험 적용이 안되고 진단을 하는 병원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진입장벽이 높아 나처럼 치료시기를 놓쳐서 안타까운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보험적용이 되어 검사 비용도 저렴해졌고 진단을 할 수 있는 병원도 많아졌으니 방문해서 검사해 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우리 아이는 한창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 잠과의 사투로 시기를 놓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한으로 남을 것 같다.
그동안 미심쩍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는 나의 진짜 게으름이 아닌 잠이 많고 의지가 부족하다는 각종 오해를 받은 가짜게으름으로 마음고생 몸고생을 한 작은아이에게 우리 부부는 오늘도 온 마음을 다해 사과한다.
"미안해, 그동안 게으르다고 오해해서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