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두 아이들이 모두 독립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외출할 때, 출장 갈 때 신경 써서 먹거리를 해놓고 가지 않아도 된다.
물론 유튜브를 보면서 음식을 만드는 걸 즐겨하는 남편은 별개의 문제다.
그동안은 싫거나 좋거나 가족을 위해 음식을 장만해서 먹이고, 깨끗하게 빨래를 해서 입히는 일을 주부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나 보다.
내가 한 음식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 끼니 메뉴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스트레스였기에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삼시 세끼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모든 주부가 똑같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막상 그런 날이 오고 보니 기쁘고 홀가분할줄 알았는데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가 보다.
결혼 후 30년 동안 우리 가족은 항상 넷 또는 셋이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넷인 것은 당연했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상황에 따라 큰 녀석과 작은 녀석이 번갈아 가며 집을 들락거렸어도 가족 구성원이 부부 단둘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큰아이가 학교기숙사에 들어가면 작은 아이가 집을 지키고 있었고, 작은 아이가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군대에 가면 큰 아이가 곁을 지키며 함께 했다.
그러다가 먼저 큰 아이가 취업을 해서 독립을 했고, 이제 작은 아이마저 취업을 하면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
결혼 30년 만에 이제 정말 부부 단 둘이서만 지내야 하는 인생 제2의 챕터가 시작되었다.
물론 두 아이 모두 제 밥벌이는 하게 되어서 부모로서 할 도리는 이만 하면 다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30년을 지극정성 뒷바라지 했으면 됐지. 나도 이제는 가족들 끼니 걱정하지 않고 내 맘껏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 딱히 하고 싶은 일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
하고 싶다. 격하게 하고 싶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더욱더 하고 싶고 간절한 법이다.
끼니 챙겨줄 아이들도 없고 맘껏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형편이 되고 보니 굳이 하고 싶은 일도 가고 싶은 곳도 없어진 것이다.
맘껏 밖으로 싸돌아 다닐 줄 알았지만 작은 녀석이 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서 내가 할 일들을 사부작 사부작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동안 챙겨야 할 아이들 때문에 싸돌아다니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집에 있는 것이 편하고 좋은 집순이 었던 것이다.
다만 집에 있을 때는 항상 가족 중 누군가와 점심을 먹었었는데 이제 매일 나 혼자 점심을 먹는 것이 아직은 익숙지 않다.
때 되면 배꼽시계가 울려 배고프다고 밥 재촉하는 아들이 없으니 편한 시간에 대충 한 끼 때운다.
식탁이 허전하고 냉장고도 텅텅 비어 있다.
"엄마, 오늘 점심은 뭐 먹어요? 먹을 것 없으면 라면 끓일까요?"
아들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마치 그에 응답하듯 냄비에 라면 끓일 물을 올리면서 '그래 오늘도 간단하게 라면이나 먹자.'
고작 작은 아이 한 명 빠져나갔을 뿐인데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작은 아이의 짐이 빠져나가고 보니 새삼스레 우리 집이 이렇게 넓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작은 아이가 있던 방문을 열어보지만 어지럽힐 사람이 없어 정돈된 그 방이 적막하고 쓸쓸하다.
성장한 자식을 떠나보내고 난 후 부모가 느끼게 되는 쓸쓸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상태를 심리학적인 용어로 빈 둥지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라 한다.
특히 빈 둥지 증후군은 시기적으로 갱년기와 맞물려 찾아오기 때문에 우울감을 더 심하게 느끼기도 한다.
요즘 나 역시 일정 부분 빈 둥지 증후군을 느낀다.
그나마 주말이 되면 두 아들은 각자의 필요에 의해 찾아오기 때문에 주말이면 예전처럼 집이 꽉 찬 것 같고 북적거려서 좋다.
먹고 싶은 음식들을 실컷 배부르게 먹이고, 빨래도 깨끗하게 해서 다려 보내는 소소한 기쁨과 분주함이 있어 주말이 기다려진다.
바로 너 때문에 빈 둥지 증후군을 느낄 틈이 없다.
그런데 사실 나의 빈 둥지 증후군을 애써 막아주는 존재가 있다.
어쩌면 그 존재로 인해서 아직은 그럭저럭 빈 둥지 증후군을 견딜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올해로 16년째 동거동락하고 있는 반려견 깜지가 그 주인공이다.
오랜 세월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줬던 깜지가 이제는 나이를 먹어 더 이상 우리에게 행복만을 주지는 않는다.
눈은 백내장이 와서 앞을 잘 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쿵쿵 부딪치고 다닌다.
귀도 잘 안 들려 크게 얘기해야 하고 여자라서 하이톤인 내 목소리에만 민감하게 반응한다.
냄새도 잘 못 맡아서 간식을 코 앞에다 들이밀어야 먹는다.
노화로 털이 다 빠져서 속살이 휑하게 다 보여 보기에도 안쓰럽고 추위도 엄청 탄다.
소변실수도 가끔 하고, 소화를 잘 못 시켜서 툭하면 토해서 빨래도 자주 해야 하고 냄새도 난다.
하루 24시간 중 먹을 때와 생리현상을 해결할 때 외에는 22시간쯤 잔다.
온 가족의 해피바이러스에서 이제는 우리 가족의 걱정거리가 되었고, 안부를 묻는 존재가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우리들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반려견 깜지의 노화를 보면서 서서히 늙어가는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한없이 짠하면서도 우울하다.
아이들이 있었을 때는 내가 여행을 가도, 일 때문에 워크숍이나 출장을 가도 깜지를 돌봐줄 누군가는 항상 깜지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깜지를 돌봐주는 것이 우리 부부, 특히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나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집을 비우는 것이 예전보다 더 어렵게 되어 버렸다.
앞으로 일이 많아질 4월부터는 깜지 혼자서 견뎌야 할 시간이 더 많아질 텐데 이래저래 걱정이 한가득이다.
노령견이고 모든 기능이 조금씩 잃어가다 보니 항상 무지개다리를 건네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또 하고 있지만 마음은 저릿하다.
어쩌면 반려견 깜지로 인해 나의 진짜 빈 둥지 증후군이 아직은 오지 않은 것 같다.
깜지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직은 나 이외의 생명체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은 줄어드는 것 같다.
앞으로 얼마나 우리와 더 살지 모르는 깜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나면 그때 비로소 나는 빈 둥지 증후군을 아주 세게 겪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