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도 없는 집에 놀러 왔다.
이따 약 먹을 땐 커피 마신 일회용 컵을 씻어서 물을 담아 마셔야 한다.
친한 언니가 이사를 해서 와봤다. 원래 요리를 안 해 먹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집에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주방은 길고 넓은 집이다. 오피스텔인데 냉장고부터 인덕션까지 길게 한쪽 벽면을 다 쓰고 있다. 언니가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옷을 넣을 공간이 없다고 어디에 보관하냐고 부동산 중개인한테 물어봤다는데, 중개인 말처럼 싱크대 위 수납장에 넣으면 되겠다. 혹시 진짜 옷을 넣었나? 해서 열어봤는데 수납장엔 아직 아무것도 없다.
침대, 1x1사이즈의 유리협탁, 장스탠드, 전신거울, 행거로만 이루어져 있다. 행거에도 패딩 하나, 코트하나, 목도리 하나, 모자 하나 걸려있다. 하나씩 있다. 마음에 들면 색별로 사는 나와는 달리 자기 역할을 하는 물건들은 딱 한 개씩만 있다. 이렇게 살 수 있나? 싶은데 살아지나 보다.
이렇게 간결하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금방 어디든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이고 지고 안아야 하는 짐이 많지 않아서 마음먹은 대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을 자주 다니고 비행에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는 언니에게 어울리는 새 집이다. 언니는 자유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