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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로 Jan 30. 2022

한예종 연극원에서 네이버 개발자가 되기까지 3편

학교 떠나면 개고생이라던데

3-1 한예종 자퇴해야겠어요


 과외 수업만으로 프로그래머가 되기엔 한계가 있었다. 방향을 잘 잡아줄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났다면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한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의 과외를 실패한 뒤로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최근 들어 2~3년 만에 프로그래밍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양질의 교육 기관과 강의 자료들이 많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국비지원 학원 말고는 특별히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있더라도 대학교 4년제를 졸업한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정도 뿐이였고 한시라도 빨리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싶은 나 같은 비전공자가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한예종은 순수 예술 학교이기 때문에 관련 정보를 얻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나는 사설 학원이나 부트캠프를 다닐 돈이 없었다. 살고 있는 집도, 부모님이 일하는 사업장도 안타깝게도 아빠의 잘못으로 홀라당 사라지고 억대가 넘는 빚더미만 남았었다. 하루 아침에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당시의 절망감은 지금도 쉽게 표현하기가 어렵다. 엄마는 정신과에 가서 약을 먹었고 아빠는 디스크까지 파열돼 걷기가 어려웠다. 가난한 예술 대학생으로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  미래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로 가득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딱 이랬을 것이다. 큰 결심을 하고 교수님께 문자를 드려 약속 날짜를 잡았다. 약속 당일 교수실에 찾아갔다.

교수님, 저 자퇴하려구요

 응 어디 편입하니? 교수님은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셨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개인 사정이 있어서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얘기했다. 학교 생활을 놀면서 다닌 걸 아신 걸까. 문제아 한 명 잘 내보냈다는 듯 쿨하게 보내주시는 교수님을 뒤로한 채 학교 밖을 나왔다. 홀가분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나는 곧장 국비지원 학원을 알아보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 대학교 재학생은 국비지원 학원에 지원할 수 없었다.


 학교를 자퇴하고 지원 자격을 갖추게 된 나는 서울에 있는 학원에 상담을 받았다. 온전하게 얻은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아니,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다른 학교로 편입하는 걸 생각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서 빨리 일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대안이라 생각했다. 이론보다 실무적인 스킬을 쌓고 싶은 마음도 컸다. 나는 늘 현장에서 배우고 일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다.


3-2 수능 때 뭐했어? 이제 공부해야지 ^^


 당시 국비지원 학원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있었는데(지금도 종종 보이지만) 정부가 it 일용직을 양산하기 위해 만든 정책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6개월 동안 9시부터 6시까지 매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는 더 좋은 곳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프로그래밍을 계속 할지 말지를 결정 짓기에는 충분한 시간과 기간이라 생각했다. 여기서도 지난번의 과외와 같이 발전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다른 길을 찾으리라 마음 먹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는 거야. 여기서 털리면 짐싸야지 ㅎㅎ....(ㅠ)

 강남에 있던 국비지원 학원의 시설은 썩 좋지 않았다. 구비된 컴퓨터도 오래된 느낌이 났고 개인 노트북을 지참해야 했다. 네이버 카페와 개발자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그나마 평가가 괜찮았던 곳이라 여기를 골랐고 적당히 2000년대 초반의 빈티지한 느낌을 감상하며 '뭐 나쁘지 않네'라고 속으로 되뇌였다.


 첫 수업 날,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오손도손 모여 제각기 학원에 오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얘기를 나눴다. 학교 전공 수업에서 취업할 정도의 실력은 안되는 것 같아 보충하려고 왔다는 사람, 프로그래밍을 모르는 비전공자라 배워보고 싶어서 왔다는 사람, 대기업을 퇴사하고 코딩에 관심이 생겨서 왔다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비율은 5:5 정도로 비슷했다. 강사님은 20년 가까이 경력을 쌓으신 분으로 책도 편찬하고 프리랜서로 일하시는 업계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이었다.

멍멍

 수업은 Java 웹개발 과정이었고 백엔드와 프론트엔드를 같이 배웠다. 6개월 안에 컴퓨터 기초, 백엔드, 프론트엔드까지 배운다는 건 쉽지 않다. 한 분야만 파더라도 어렵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웹 서비스가 만들어지는지 전반적인 흐름을 익히기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만약 취업을 목표로 한다면 한 분야만 6개월 동안 파는 게 더 유리할 것이다.) 강사님은 이제껏 들었던 그 어떤 강의보다 알기 쉽게 개념 설명을 해주셨고 코드가 동작하는 원리에 대해 반드시 짚어주셨다. jQuery를 쓴다고 하면 단순히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javascript로 jQuery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spring을 쓴다고 하면 java로 spring을 직접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삼각함수를 배울 때도 왜 삼각함수가 필요한지 고민하는 학생이었고 어떤 공식 하나를 알게 돼도 그 공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꼭 찾아보는 학생이었다. 그냥 그렇구나 받아들이면 되는데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답답함에 지식 습득이 안되는 이상한 체질을 갖고 있다. 호기심이 많은 나한테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술을 가져다 쓰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 기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원리를 알려주는 강사님의 강의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


 아침 7시쯤 일어나 9시에 학원에 도착해서 저녁 6시까지 수업을 듣고 밤 10시까지 자습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12시가 되는 일상을 6개월 동안 보냈다. java, nodejs, html, css, javascript를 배웠다. 학원이 집에서 멀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책도 읽고 강의도 많이 들었다. 학점은행제 시험을 쳐서 정보처리전공 전문학사를 땄고 앞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팀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공부를 했고 수능 때보다 더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국비지원 과정은 팀 프로젝트 발표를 끝으로 끝이 났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서로에게 자극도 되고 도움도 주면서 길다면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그때 함께 팀을 했던 누나는 지금도 소중한 친구가 되어 인생에서 많은 걸 나누고 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취업 뿐이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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