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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적당히 바람이 시원해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귓가를 간질이는 천진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반사적으로 휴대폰 볼륨 버튼을 눌러 벨소리를 무음으로 돌렸다. 다시 잠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찰나, 안녕하세요……. 눈꺼풀을 짓누르는 피로를 뒤로하고 화면을 보니 전혀 기분 좋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떠 있었다. 새벽 네 시를 겨우 넘긴 시각이었다. 두 시간이나 제대로 잤을까. 전화가 끊기자마자 곧바로 울려 대는 벨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베개에 겨우 등을 대고 전화를 받으려는데 배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보기에도 조그마한 이 몸통에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는 건지 경악스러웠다. 문득 시끄러운 벨소리는 핑계고 배가 고파서 잠에서 깬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지독했다. “네, 저예요.” 새벽부터 전화질을 해대면 어떡하느냐는 짜증을 정성껏 그러담아 짤막하게 말했다. 목소리 좀 내려 깐다고 신경 쓸 사람도 아니지만. “어, 안 자고 있었나 봐? 잘됐다.” 무슨 개 같은 소리지. 전화를 세 번이나 연달아 거니까 전화를 받았지. 뭐, 이런 생각을 해봤자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처지가 아니니 속으로 삼켰다. “무슨 일이세요?” 팀장은 이 새벽에도 밖에 있는 건지, 전화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팀장은 시끄러운 주변을 정리하려는 듯 조용히 좀 해, 라고 소리쳤다. “아니 우리 콘셉트 있잖아.” 조용히 해보라니까.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조용히 하라는 소리 안 들려? 팀장은 과연 나와 대화하는 게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산만했다. “청바지 돌려입기로 가자. 영화 알지?” 영화는 알겠다만 왜 뜬금없이 청바지를 돌려 입자는 건가. “촬영 때 보겠지만 오늘 한 명 더 올 거야. 청바지에 흰 티 입고 와. 듣고 있는 거야?”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화보 촬영을 몇 시간 앞두고 새벽에 콘셉트를 바꾼다는 거지. 콘셉트가 바뀌는 건 예삿일이었다. 촬영 한 시간 전에도 바뀔 수 있는 게 콘셉트고 그것에 불만을 갖는 건 이미 틀린 사람―팀장 말로는 프로답지 못한, 전문적이지 못한, 아니면 유연하지도 못하고 전문성도 없는―이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결국 대답은 이렇게 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게요. 근데 원고는…….” “싫다고 하는 법이 없어서 좋다니까. 그럼 이따 봐.” 팀장은 더는 볼일 없다는 투로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아니, 내 말이 다 안 끝났잖아. 원고는, 내 글은 어떡할 거냐고 물으려는데 그렇게 전화를 끊어 버리면, 나는, 내 글은. 며칠 내내 공들여 정했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같은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원고지 팔십 매를 넘겨야 하는 원고는 어떡한단 말인가. 꺼진 휴대폰 화면에 두 눈을 멀뚱거리는 내 얼굴이 비쳤다. 배 속에서 또 꾸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냉장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그래, 먹자.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라, 먹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배고프면 잠이 안 오고 잠을 못 자면 하루가 피곤해지고 그러면 원고도 쓰지 못할 테니까. 괜히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이불을 걷어 냈다.
거실로 나가 불을 켰다. 멀쩡했던 조명이 번쩍, 하더니 빠르게 깜빡였다. 단 한 번도 말썽 피운 적 없던 조명이지만, 오늘같이 짜증이 몰려드는 새벽이야 말로 지랄하기 적절한 타이밍이니까. 그래, 너는 네 몫을 해냈구나. 계속해서 번쩍이는 조명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조명이 꺼질 때마다 빛의 잔상이 남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며칠 전 아침 방송에서 들은 심리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화가 날수록 억지로라도 소리 내 웃어야 해요. 특히 웃을 때 박수를 쳐주면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데 효과적이에요. 그래, 좋다는 게 좋은 거지. 하, 하하, 하하하, 하. 과장된 몸짓으로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정확한 발음으로 웃었다. 웃었다기보다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지만. 하, 하하, 하하하, 하. 그러자 신기하게도 조명이 정상적으로 돌아와 방 안을 환히 밝혔다. 심리학자는 역시 사물의 심리도 꿰뚫어 보는 것인가. 밝아진 덕분에 냉장고 앞에 놓인 체중계가 눈에 띄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의식적으로 경계하기 위해 가져다 놓았다. 실제로도 도움이 되었다. 물 한 모금에도 금세 숫자가 바뀌어 버리니 체중계 앞에선 한없이 숙연해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체중계 앞에서 석고대죄를 하고 고해성사를 하고, 조금이라도 과식한 날엔 그 앞에서 땅을 치고 후회했다. 엄마는 이런 날 한심하게 쳐다보다 주님, 주님보다 체중계를 섬기는 죄인이 여기 있습니다, 하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체중계의 숫자가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냉장고를 빤히 쳐다보았다. 냉장고 안에서 기다란 팔이 뻗어 나와 내게 손짓했다. 부르면 가야죠, 네, 네. 냉장고로 걸어가는데 절로 슬로우 모션이.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어디선가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나의 지난한 독백일 것이다. 먹으면 후회만 할 거야.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해왔는가. 이미 다 아는 맛이다. 행복을 위해 먹는다지만 입에 들어가자마자 불행을 불러 오는 게 밀가루다. 탄수화물이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화보에 실린 내 사진을 보거나 SNS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말한다. 몸매가 좋다고, 날씬해서, 아니 말라서 좋겠다고. 좋다. 물론 좋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떡볶이의 맛은 먹을 때마다 다르다. 떡볶이의 찐득한 국물과 쫀득한 떡과 쫄깃한 넓적 당면은 먹어도 먹어도 행복을 가져다준다. 술안주로는 매콤하고 짠 음식이 제격이며 해장할 때는 국밥이나 라면, 때로는 햄버거가 최고다. 나라고 이런 사실을 모른다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요즘 인터넷을 달구는 소식좌라거나 음식을 맛없게 먹지도 않는다. 다만 살이 찌면 회사에선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아주, 널렸으니까. 얼떨결에 잡은 기회라지만 다시는 없을 수도 있는 이 기회를 몸무게와 붓기 따위로 날려 버릴 바보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이 피 나는 노력을 안다면 구독 좀 해달란 말이다. 사진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뼈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이 몸뚱이가 아니라, 그 아래 쓰인 나의 글을 보란 말이다. 당신들이 구독한 건 패션잡지가 아니라 문학잡지란 말이다. 독백이 끝나는 순간 냉동고 문을 열었다. 다시 거실 조명이 꺼지고 대신 냉동고 조명이 딱, 나이스 타이밍. 시원히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다. 미소를 한껏 머금고 귀엽고 동글한 블루베리 통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을 둥글게 모아 그 위로 통을 살짝 기울였다. 또록. 블루베리색의 알약이 쏟아져 나왔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