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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Jan 29. 2023

<공공의 적>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 들어가기 전에...

나는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영화가 참으로 쓰레기 같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사 저변에 깔린 논리/인식 구조에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쓰레기는 치워야 하기에, 나는 환경미화원이 된 기분으로 이 영화에 대한 내 의견을 적어보고자 한다. 


(1) 이 영화는 쓰레기

나는 한 영화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영화의 만듬새’를 주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전체적 완성도’와 거의 동등한 말로서, 자세히는 영화 고유의 특성과 예술 일반의 특성 모두를 만족하는 조건을 지칭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의가 필요하므로 이 정도로 언급하겠다. 아무튼, 영화적 만듬새에 대한 나의 분명한 옹호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영화가 함축하는 어떤 태도 혹은 논리체계를 비판하고자 한다. 물론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별도로 영화가 품고 있는 사상이나 옹호 논리를 평가하는 것은 그리 의미있지 않다. 차라리 논문이나 책을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불현듯 스쳐 간 생각은 2000년대 초중반에 개봉한 한국형 조폭영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 싸구려 논리가 작금의 사태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영화적 만듬새에 집중하기 보다는 영화 저변에 깔린 윤리관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래도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만듬새에 있어서 그럭저럭 잘 만든 영화다. 오락 영화로서 장르적 쾌감을 기본으로 충족시키고 있고, 두 주인공의 개성과 대립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야기의 기승전결 구조도 상당히 괜찮다. 다만 강철중(설경구)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과장된 느낌을 준다는 것 정도가 조금 걸릴 뿐이다. 꼴통 형사와 압도적으로 나쁜 놈의 대립은 이 영화를 주로 이끌어가는 서사로서 최종적인 영화적 카타르시스를 구현하는 주요 역할을 한다. 약간의 변주가 있을 뿐이지, 영화 <베테랑>, <악인전>, <범죄도시>는 이러한 류의 서사구조를 담습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글에서 내 비판지점에 정확히 포함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2023년인 지금 보아도 꽤 재미있는 영화다. 다만 이 영화를 즐기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어떤 찜찜함이 문제적이라고 볼 뿐이다.


전통적인 선악 구도로 둔갑한 정말 나쁜 놈과 조금 덜 나쁜 놈 사이의 대립.


(2) 폭력 옹호를 위한 쓰레기 논리

강우석 감독의 2002년작 <공공의 적>은 당대 흥행작으로 약 350 만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당시 한국 영화는 ‘조폭 영화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사실 이 영화는 조폭이 아닌 경찰이 주인공이지만 본질상 그리 큰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악으로 더 큰 악을 무찌른다는 영화 저변에 깔린 논리가 당시 조폭 영화와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선악의 대립 구도를 받아들인다. 바로 위 문장과 상반되는 듯하나 그렇지 않다. 여하튼 감독의 의도는 ‘강철중(설경구)은 언뜻 나쁘고 이상해 보이나 실상은 정의롭고 착한 녀석’이다. 즉, 강철중은 선의 대상으로 설정된다. 반면에 조규혁(이성재)은 그렇지 않은 대놓고 나쁜 악의 대상이다. 그는 ‘괜찮은 한 집안의 가장이나 알고 보면 정말 나쁜 놈’이다. 당시에는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이전이었으나 규혁의 무자비한 잔인성은 분명 여기에 부합하는 것 같다. (참고로,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악인전>은 성공여부와는 별도로 다소 신선한 시도였음은 분명하다) 영화적 설정은 지금 관점에서도 다소 충격적이다. 정말 나쁜 놈인 규혁은 선량한 시민을 죽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기 이익을 위해 부모까지 살해한다. 규혁은 관객 입장에서 절대악 정도로 간주된다. 그의 폭력은 무자비하며 최소한의 합리성과 도덕적 판단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반드시’라는 확신이 ‘어쩔수 없이’로 둔갑하는 것이 이 영화를 지배하는, 아니 지난 한국형 조폭영화를 지배하는 논리였다. 저 절대악 타도를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강철중 같은 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어떤 관객도, 아무도 강철중이 완벽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체제 반항적이고, 다혈질이고, 걸핏하면 욕설, 협박, 그리고 폭력을 일삼는다. 그러나 정말 아니다 싶은 것은 결코 넘어가지 못하는 그런 정의감은 살아있다. 그런데 이 순간에는 저기에 절대 타도 대상이 있다. 이러한 고려에서 영화는 강철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논리가 조폭 영화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에 걸쳐 통용된 폭력 옹호 논리라고 생각한다. 조금 맞더라도 대학을 못 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중/고등학교), 금메달 못 따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체육계), 부당하더라도 군기가 무너지는 것보다 나으니까(군대), 조금 하자 있어도 지금/지난 정권보다는 나으니까(정치권) 등등의 논법은 정말 어디서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논리의 허점은 어떠한 방식에서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보편 윤리 명제를 위반한다는 것이다. 대학을 못 가더라도, 메달을 못 따더라도, 군기가 무너지더라도, 안 맞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더 올바른 방향이다. 그리고 상대가 더 나쁘다고 하더라도 덜 나쁜 이 사람을 뽑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둘 다 똑같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나쁨에는 비교급이 통용되나 그렇다고 해서 덜 나쁜 것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맞아도 싼 이유는 없다.


(3) 진정한 쓰레기: 강철중

하지만 영화 속 강철중의 폭력은 조규혁보다 상대적으로 덜 나쁘다는 이유로 합리화된다. 아니, 어쩌면 ‘합리화’라는 단어가 상당히 부정직할지도 모르겠다. 강철중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영화는 최소한 합리적 설득보다는 쾌감을 통한 눈속임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칼로 배때기를 쑤시고 다니는 양아치(유해진) 정도는 좀 손찌검하면서 막 다루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강철중의 사고방식에 대해 관객은 묘한 쾌감을 얻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매우 이상할 뿐만이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살인사건의 피의자도 아니고 당연히 영장도 없는데, 단지 지난 과거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양아치는 여자친구와의 사적인 시간을 이렇게 함부로 침해받아도 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우리가 강철중을 바라보며 속 시원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폭력이 가져다주는 말초적 쾌감이 아니다. 그것은 적법한 절차 따위는 비효율적이라고 간주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만약 강철중이 상부 지시도 따르고, 영장도 받고, 윽박이나 폭력 없이 피의자의 인권을 지키며, 차례대로 수사를 진행했더라면 그것은 일련의 길고 지루한 과정으로서 당연히 편집의 대상이 될 것이다. 즉 관객은 이러한 과정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감독 또한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폭력적인 점은 바로 폭력을 통해 영화적 압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철중이 조규혁을 잡기 위해 다가가는 수사과정을 그냥 몇 대 때리면서 쌍욕을 좀 해주면 힌트가 나오는 그런 식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보여주는 역할이 바로 그러한데, 봉준호 감독은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안)놀랍게도, 강우석 감독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결국 공공의 적은 강철중이다.


역설적으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한국사회의 병폐적 측면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무관심과 폭력의 무감각. “뭐 이정도 가지고 그래?”라는 태도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지점에서까지 타협하는 태도를 비판하고자 함이다. 우리는 이미 조국 사태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시 한 번 직시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 후반부에 강철중이 하는 대사는 자기지시적으로 들린다. 


아주 간결하게도, 공공의 적은 강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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