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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Jul 27. 2023

<바비>

인형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실존의 여정 

가장 개인적인 사건은 죽음과 사랑이다. 반대로, 가장 비-개인적인 사건은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죽음은 개인을 경계 짓는 사건이니 말이다. 우리는 단순히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더 있으며,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고 믿는다. 행복은 여기에 가장 일반적이고도 모범적인, 그러기에 가장 오답에 가까운 대답이다. 목표를 이미 성취하고 파티로 매일을 채워나가는 것, 어제와 내일이 안락한 오늘과 일치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이자 삶의 의미라고 믿는다. 가장 비-개인적인 사건이 가장 개인적인 삶으로 둔갑하는 현시대적 착오. 영화 <바비>는 이러한 통념을 저격한다. 

행복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대신에 삶은 시작된다.


바비(마고 로비)는 행복하다. 의식주는 기본적으로 충족된 상태이며 어떠한 고난도 없다. 한 마디로 그녀에게 삶의 무게는 없다. 높은 곳에 뛰어내려도 발 앞꿈치로 가뿐히 착지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른 바비들도 마찬가지다. 인종과 직업이 서로 다른 바비들은 모두 행복한 삶을 누린다는 점에서 서로 같다. 행복의 시공간에 균열을 가하는 것은 단 한 단어, 바로 ‘죽음’이다. 그 단어는 스탠더드 바비 한 개인을 기습하여 파티로 가득 찬 순간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바비랜드는 균열하여 위기를 맞이한다.


우리 모두의 삶은 뒤꿈치가 땅에 닿는 삶이다. 


이제 중력은 바비에게 적용된다. 그녀는 착지에 실패하고 뒤꿈치가 땅에 닿는다. 매끄러운 그녀의 허벅지에는 셀룰라이트가 생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일련의 사건들이 다른 바비들이 아닌 바비(마고 로비) 개인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를 제외하고 바비랜드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계-내-존재였던 바비는 세계와 분리되어 독자적 존재가 된다. 그리고 실존의 사건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와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그랬던 것처럼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한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바비가 진짜 세계를 선택하길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행복은 치명적이고 실제 세계의 단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바비 역시 진짜 세계로 여정을 떠난다.


바비랜드는 주어지는 행복이 구체화된 이상향이다. 현실세계와의 대조를 통해 영화는 행복의 건너편으로 삶을 위치시킨다.


바비는 생식기가 없다. 생식기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배뇨 작용과 성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체액을 섭취하니 몸 밖으로 나올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섹스를 못한다는 것은 다소 기괴하고 의미심장하다. 가장 은밀하고 개인적인, 종족 번식 본능과 평면적인 쾌락을 넘어선 그 짓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비가 인간이 아닌 인형이라는 중요한 단서인 것이다. 섹스가 불가한 바비는 사랑이라는 행위가 애초에 차단되는 존재로서 규정되는데, 이러한 설정은 바비의 삶이 진정한 행복인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영화의 전복적 장치는 바비와 캔(라이언 고슬링) 사이의 관계다. 생식기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개인이 배제된 임의적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영화는 여기에 어떤 중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바비는 현실세계에서 자기 존재 근원을 찾아다닌다. 인형(도구적 존재)이 주인(주체)을 만나고, 상품이 회사를 찾아가는 장면은 영화적 기발함을 넘어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일방향적 관계를 거스르는 만남을 통해 바비는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그녀의 핑크빛 삶, 그러니까 바비랜드의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남자들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 구성된 허구라는 것을 말이다. 한편, 현실세계를 경험한 캔도 바비랜드의 허구성을 깨닫는다. 다만 그의 깨달음은 가부장제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통해 바비랜드 이데올로기의 임의성을 자각하는 것에 있다. 그리하여 캔은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이라는 이상을 바비랜드에 새롭게 이식한다. 이러한 기발한 전개를 통해 영화는 가부장제, 페미니즘, 그리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데올로기의 태생적 한계를 폭로한다.


캔과 바비 역에서 비주얼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이 영화의 캐스팅은 다소 아쉽다. 배우에게 연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교훈이다.


이데올로기가 걷히면 비로소 개인과 개인의 삶이 보인다. 도망치다가 우연히 도착한 어느 공간에서 바비는 따뜻한 차를 처음 마셔본다. 마시는 시늉이 아닌 진짜 마시는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개인의 삶이 실제(reality)이며, 실제는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원초적인 것(fundamentality)이라고 설파한다. 캔의 왕국으로 돌아온 바비는 혁명의 투사가 되어 다시 체제를 전복시킨다. 바비랜드 이데올로기의 복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캔은 나야.”라는 자기 지시적 문장에는 여성 종속적인 남성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캔에게도 어느 정도의 공직을 허용하겠다는 대통령 바비의 공언은 제도적 개선 그 이상의 어떤 진보성이 함축된다.


체제의 전복, 복구, 그리고 진보. 이러한 사태를 겪으며 바비는 바비랜드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이제 그녀는 ‘스탠더드 바비’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린다. 대신에 ‘바바라’라는 고유 명사, 즉 한 이름을 부여받는다. 인형이길 포기하고 인간이 되길 선택한 그녀에게는 삶의 비밀과 대면할 기화가 주어진다. 그것은 사랑이다. 삶은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바비는 알게 된다. 그리고 바바라는 플랫 슈즈를 신은 채 병원으로 향한다. 자신의 생식기를 확인한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사랑의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녀는 이제 사랑을 하면서 수많은 기쁨과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단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이 개인의 인생, 그 어떤 가치로도 환원불가한 것이다. 부디 그녀에게 삶의 축복이 함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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