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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보상심리

나는 왜 희생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을까?

엄마는 맛있는 게 있으면 우리에게 먼저 양보하고 자신의 삶보다 자식의 삶을 우선시하며 살아왔다. 사랑은 소통하고 연결하는 건데 , 한쪽은 무겁고 한쪽은 가벼운 불균형적 관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나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챙겨주고, 그 존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사회적 가치관의 대물림을 통해 사랑에 대해 맹목적으로 갈망해 왔다.

내가 남편과 아이들에게 희생했던 이유를 차분히 찾아보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던 시기 남편을 만났고 남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외로움을 해소해 주었고 의지처가 되어준 남편에게 사랑받기 위해, 버림받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의 욕구보다 남편의 욕구와 편의를 더 챙겼다. 내가 이것저것 챙겨주는걸 남편은 좋아했고 상대가 좋은 걸 해주고 맞춰주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증명해 보이고 싶었고, 나의 진심이 ‘이 정도까지’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완벽하게 책임지려고 하고 주는 사랑을 느끼고 싶어 했다. ‘너희들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주는 엄마야’ 쓸모를 증명해 보이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성숙한 방식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열심히 내 몸 불살라가며 희생을 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도 균형 있게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꽤 오랜 시간 희생정신에 몰두했다.

10년 정도는 내 개인시간은 가지지 못했다. 늘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나보다 아이들, 남편위주의 생활을 했기에 어느새 ‘나’라는 사람은 희미해져 갔다.​

 희생했을 때의 결말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나의 희생은 쿨하지 않았고 보상을 바라게 되었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앉아서 받아먹기만 해? '라며 옹졸해지고 치졸해지고 바라는 게 생겼다. 순수한 사랑이고 나의 배려이고 헌신하는 게 나의 기쁨인 줄 알았는데 나의 인생이 소모되고 시간이 빼앗기고 누적되다 보니 시작은 순수하다 해도 희생하는 사랑의 결말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나의 희생을 받은 존재에게 무거운 미안함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네 잘못이야’ ‘너 때문이야’

‘내가 너에게 이만큼 해줬는데 너희들은 왜 엄마말을 안 들어줘?’


‘내가 이렇게 행복하지 않고 불만투성인건 너 때문이고 당신 때문이야’ ‘내 삶의 선택권은 나에게 없어’ ‘내가 이렇게 희생하니 당신도 아이들도 내 뜻에 따라야 해 그게 정당한 거야’ ‘내가 힘든 만큼 당신도 아이들도 그만큼 보상해 줘’ ‘안 그러면 나는 행복하지가 않아’ ‘억울해, 다른 엄마들은 여유 있게 커피도 마시고 자기 시간 가지는데 왜 나는 맨날 일만 해야 해?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나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나는 보상심리가 생기고 욕구불만이 생겼으며 투정불만으로 자꾸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그때는 헌신을 통한 불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언니의 경우 어릴 때부터 허약체질에 몸이 많이 아팠다. 엄마는 그런 언니를 유독 많이 챙겨줬고 도시락 싸는 것, 숙제하는 것 등 자기 할 일 알아서 해내는 내 몫으로 넘겨주며 언니를 공주대접하며 키웠다. 엄마는 언니의 손발이 되어 부탁하기도 전에 벌써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했다. 언니는 엄마가 뭐든 해결해 주니까 자신이 부딪쳐서 이겨낼 힘을 점점 잃어갔고 자신을 스스로 ‘나약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갔던 것 같다.


지금의 언니는 의지가 약한 편이다. 스스로 결정하기를 두려워하고 무슨 일이든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와 나에게 과한 죄책감을 가진다.

“나 때문에 네가 힘들었지” “나 때문에 엄마가 힘들었어” “미안해, 내가 잘못이야”


죄책감은 위장된 분노이자, 자기 공격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때마다 너무 속상하다. 아무리 언니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줘도 뿌리 깊어진 헌신의 희생양으로 살아온 언니는 그 틀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엄마는 자신의 두려움을 놓지 못하시고 아직도 언니를 만나면 아이 대하듯 하시고, 언니는 그런 엄마의 마음이 불편한 건지 엄마와의 관계가 서로 소원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과한 희생을 한다는 것은 후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식을 미숙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닐까

자신을 희생해서 한 존재의 안녕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거였는데 결국은 누구를 위한 희생이 된 건지 희생한 사람도 , 희생받은 사람도 서로 힘들어지는 것 같다.


희생하다 보면 지치게 되고 자신의 삶의 기쁨이 줄어들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모습을 보는 희생받는 사람은 마음이 편하지가 않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희생은 자기 생각이 우선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사랑받고 싶어서, 내 두려움 때문에 ,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다 보니 정작 상대가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 무력감을 느끼는지에 대한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희생을 받은 존재는 ‘자신의 몫인 인생숙제’를 스스로 해내지 못하기도 한다.


사람은 살아가는 시기마다 제대로 살아가고 자립하기 위한 인생의 숙제를 마주하게 된다. 부모의 품을 떠나서 유치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사회생활, 그리고 타인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희생하는 사랑은 본의 아니게 그 기회를 막게 되고 이치를 거르며 상대방의 숙제를 무리하게 빼앗아 오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사람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 행복, 기쁨, 즐거움, 감동 이런 것뿐만 아니라 불행, 고통, 외로움, 두려움, 단절감, 소외감, 자괴감, 열등감 이런 것들로부터 도 사람이 성장을 한다.

근데 이 사람이 지금 괴로워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삶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다 빼낸다면 그 사람은 성숙해질 기회를 놓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로 상대방을 위하고 사랑한다면 , 나 없이도 상대가 잘 사는 걸 생각해야 하고, 나라는 존재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나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강요했고 선택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희생하지 않는 균형적 사랑도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일방통행이었던 희생에서 쌍방통행인 소통과 연결의 사랑으로 가는 여정.  익숙한 길에서 미약하지만 작은 변화들을 점진적으로 시도해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커피 마시며 독서하기 , 햇빛 보며 산책하기

나만의 시간 갖기 , 명상하기​


너무 오래 아이들과 붙어있었더니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했는지 내가 원하는 건 전부 혼자 즐기는 것 들이다.

이 부분이 채워지면 함께도 좋고 혼자도 좋은 시간이 오겠지?


토요일 하루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겨두고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걸 해본다. 나에게는 커다란 도전이다. 그래도 용기 내어본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도움받기, 집안일 위임하기 등도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내가 행복하고 기쁘니 그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가족들에게 흘러간다.​

불균형의 헌신 경험을 통해 균형의 사랑을 배웁니다.

그 모든 경험들 덕분입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모든 것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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