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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뉼이 Oct 27. 2024

우리의 처음은 달랐다

소파 밑을 지나가는 바퀴벌레....

어느새 집안 곳곳에 그놈의 벌레가 또 한 차례의 번식을 통해 나의 생활공간을 어지럽게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들이 어둠 속에서 우글거리는 것에 대한 불쾌감보다 그것들에 대한 처단을 기피하는 나태함이 커져만 갔다. 나의 집, 나의 발길만이 유일한 생기를 북돋게 하는 이 곳,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카오스의 도가니가 된 채 바퀴벌레나 다닥거리는 소리만 자욱한 나의 집.

나는 소파에 앉아 쾌쾌 묵은 책 한권을 꺼내 읽으며 몇 번의 재채기를 토해내다 큰 한 숨과 함께 책을 접어 버렸다. 그리고 이내 깊은 어둠 속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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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리 띠띠리~~~'

다섯 시 반을 알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피곤을 느끼는 몸둥이가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사 신경은 나를 일으켜 세워 아침을 맞이할 준비에 바빠 있었다.

내가 남들보다 기상이 빠른 이유는 남들보다 굼뜬 나의 행동을 만회하기 위함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게 부스스했지만, 일단 나는 칫솔부터 들어 나의 구강에 상쾌함을 불어 넣었다. 얼마를 그렇게 닦았을까?

이런 나의 무의식적 행동에 의식이 되돌아오게 만든 건 어제 읽었던 책의 구절이 불현듯 머릿속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무릇 사랑한다면 어찌 멀 수 있겠느냐?


양치질을 대충 끝마치고 나는 다시 소파위에 올려져있던 책을 들쳐보았다. 『논어』였다. 책장을 넘기고 넘겨 그것이 있는 곳에 눈길이 멈칫했다.


당체 나무 고운 꽃 어느덧 다져가네 어찌 그댈 생각 않으리오마는 계신 곳 멀리 있네. 

이 시를 듣고 공자를 말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무릇 사랑한다면 어찌 멀 수 있겠느냐?”


나는 주섬주섬 공부할 책을 가방에 쑤셔 널고 청바지에 흰색 면 티를 걸쳐 입고 푸른색 색안경 하나를 걸치고 집 밖을 나왔다. 나는 그와 잠시라도 멀어질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앗! 핸드폰!"

집에 다시 들어가 핸드폰을 챙겨 부랴부랴 지하철을 탔다.


6:00 AM

꾸벅 꾸벅 조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켜보니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나 같은 백수..... 아니, 아니, 자기계발 중인 사람이 볼 때 어디선가 자기 책상을 하나 맡고 있는 독하디 독한 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헤드 뱅잉을 해대며 졸고 있는 모습이 환상의 틈을 깨고 그 사이로 미소 띤 승리감을 가져다준다. 그 틈에서 유일하게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앉아 있는 나는 참으로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만큼은 뒤로 자빠져도 우월감이란 자기만족의 콧대에 처박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올라오자마자 입구 옆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김밥과 음료수를 사들고 설하가 있는 학교의 실험실로 향했다. 실험실에 들어서자마자 얼떨떨한 표정의 설하는 손에 쥔 마우스를 들고선 정지 화면처럼 멈춰 있었다. 잠깐의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아니, 아침부터 웬 오락? 하라는 공부는 죽어라 안 해요~"

"아니, 아침부터 이게 웬 날벼락이랴? 안 하던 짓 했더니 이렇게 날 찾아오니.. "

"안 하던 짓이라니? 매일 아침 루틴 아니야? 암튼 자기 아침 굶을까봐 이 몸이 행차를 해버렸지. 우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잖아.. 사랑하면서~ 아니... 사랑하니까.. 음.. 사랑으로?!"

"?!#@$ 뭔 소리래?"

"그냥 이 말해주고 싶어서... 난 늘 자기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아니~~ 얘가 왜 이런댜?? 이상해~~ 뭘 잘못 먹었어? 자기계발 너무 많이 한 거 아냐?"


그런 와중에도 나는 그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나는 정말 ‘돌은 자’인걸까? 


또 다시 침묵!


뭐 우리 둘을 휘감는 침묵을 굳이 깨야할 이유 없는 설하와 나 사이.. 나는 이내 실험실에 주인 없이 뒹구는 컴퓨터 앞에서 이메일 확인을 하고 이리저리 웹서핑을 하다가 쉬이 따분함을 느끼고 말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건물 밖 벤치를 찾아 터벅터벅 걸어갔다. 담배 한 대를 물고 불을 붙이자 밀려나가는 연기 속에 묻어 나가는 상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씩 하염없이 내 삶 한 가운데 서 있는 불행을 바라보기만 할 때가 있다. 비켜갈 새도 없이 너무나 바짝 다가온 그것을 바라보고는 나는 뭔가를 해볼 겨를도 없이 불행에 잠식당해버렸다고.. 그렇게 해일에 덮여 얼어버린 몸둥이를 하고는 옴짝달싹 못하게... 순간이 멈춰져 있는 경험을 하고서 말이다. 


그러나 연기가 사라져갈 무렵 몽롱해졌던 정신이 번뜩거리며 초점이 맞은 듯 나의 뇌를 자극할 때쯤 이내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행복을 쏟아 부었다.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짧은 순간. 나는 그냥 행복했다. 이러한 단몽 속에서도 나를 너무도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 인간 채설하가 심히 보고 싶어진다. 


“따르르릉~”


"야, 니 김밥효과 다 떨어졌어. 배에서 신호와~ 밥 먹자~ 너 어딨냐? 이것이 말도 없이 나타났다 말도 없이 사라져요~ 너 도(道)에 관심 있다고 이상한 거 배우고 다니는 거 아녀? "

"아니~ 거기서 도가 왜 나와?"

"암튼, 너 어딨냐?"

"창문 내려다 봐봐"

"야, 애들이 한둘이 아닌데 어찌 찾아? 숨바꼭질하지 말고 그냥 말해~"

"벤치~ 큰 은행나무 옆 벤치야"

"은행나무가 한 둘인가~ 얘가 진짜~ 아아아아~~ 보인다. 보여~~ 보여 거기 딱 있어! 내려갈게~"


그가 나에게 오고 있다. 평범한 웃음을 띠고는 나에게 온다.


"야야야 배고프다.. 밥 먹자~~"

"응~. 뭐 먹을까? 오늘 메뉴 알아?"

"글쎄.. 일단 식당에 가보자. 나 배에서 엄청 신호와~ 들려? 들려?"


바쁜 걸음으로 식당에 가서 고른 메뉴! 김치찌개와 오징어덮밥.

배가 고팠던 그보다 덤덤했던 내가 더 허겁지겁 먹었다. 언제나 난 허기지다. 배가 안 고팠음에도 앞에 음식이 있으면 누구보다 배고팠던 것처럼 밥이 고프다. 밥을 먹을 때면 그렇다. 뭐.... 그럴 뿐이다. 


"설하야~ 밥 더 타올까?"

"그래~ 그러자"


다시금 줄을 서고 배식을 담당하는 아줌마들에게 가서 식판을 들이밀었다. 

"아줌마 밥 좀 더 주세요.~" 

설하와 나는 어느 순간부터 둘이서 삼 인분은 너끈히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 식당밥은 찐밥이라 배가 금방 꺼져서 애당초 집어넣을 때부터 많이 넣어야 금세 배가 꺼지는 불상사를 모면할 수가 있다. 


"설하야~ 우리 과자 하나 사먹자"

"그래~ 그러자"


내가 요즘 심취해 있는 과자 "Na"를 기쁜 마음으로 한 손에 들고 다시 학생회관 앞 벤치로 갔다. 이 자리.. 나는 이 정경이 참으로 좋다. 식사를 마치고 은행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과자를 음미할 수 있다는 것. 조금이라도 이 여유를 오래 가지고 싶어 매번 늑장을 부리게 된다.


"은영아 아까 내가 공대 도서관에 네 자리 맡아 놨었거든. 같이 가 보자. 녹차 티백 가져온 거 있어? 보온병에 물 받아 놓고 타 마시자"


아...

내가 맡아 놓지는 않아도 소유권이 나에게 오는 도서관 자리. 나의 그 자리...

나는 다시 자기계발 늪 속에 허우적댈 시간임을 자각했다. 

그래도 나는 좋다. 내 평생에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마음 놓고 행복하게(?) 그것도 돈 걱정 없이. 나는 이 순간은 마음껏 느끼고 누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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