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 한 번 안 하고 졸업했던 나는 취업만큼은 느긋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 혜인이가 취업했던 회사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혜인이를 도와주려고 갔다가 그 곳에 남게 되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졸업과 동시에 우체국 산하의 핸드폰 분실 핸드폰 찾기 콜센터에 취업을 했다. 일은 간단했다. 전국에서 분실된 핸드폰이란 핸드폰은 다 우체국을 거쳐 내가 일하는 회사에 오게 되어있고, 이것을 본래의 주인이 가입 분실 신고시 남긴 연락처로 연락해 찾아가라는 전화를 주는 게 나의 일의 전부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상대방이 핸드폰을 찾아간다는 의사를 밝히면 만원을 입금시켜달라는 말을 전달하는 거였다. 상대방이 이에 동의를 하고 입금을 하면 분실자에게 핸드폰을 전달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 처분을 하는 거였다. 다른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핸드폰이 베네수엘라? 아니면 칠레? 정확한 국가명은 모르겠지만 남미쪽 어딘가에서 위치를 추적하는 용도로 쓰여 수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익을 창출한다고까지만 알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다.
아무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통화를 하는 일이 나쁘지 않았으나, 말길을 못 알아 듣는 상대방의 답답함은 내 마음 속의 실타래를 엉키게 만들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내 말을 못 알아 듣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은 나쁘지 않았으나, 성취감이 당최 느껴지지 않는 정체불명의 감정들. 게다가 나는 아르바이트 학생과 정직원사이의 불분명한 경계 어디쯤에서 끼어 있는 애매모호한 신입으로 그 어떠한 소속감도 느끼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언젠가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늘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일을 시작한지 세 달 반이 지났다.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작심이 마침내 이성을 불러들였다.
“아영씨, 이 이름 한 번 들어봐! 피바다.”
“어머, 이 이름도 있어. 이기자.”
“하하. 어떻게 이름을 그렇게 지을 수 있지?”
“자, 봐봐 전현아~ 꼭 저년아로 들리지 않아?”
“이거 봐, 박태리 뭐냐? 박테리아냐?”
“크크크크크”
오늘도 어김없이 웃기는 이름을 찾아 즐거워하며 그것을 반복해대는 우리들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 시작했다. 그리고 내 이름이 은아영인 건 참 다행이었다. 행복을 가져다 주는 재밌는 이름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그 속에서 들여다보이는 나의 자아상과 그리고 나의 미래.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던 것은 나는 이 짓을 매일 반복하면서도 질리지도 않은 채 그렇게 깔깔대며 웃어댄다는 것이었다. 일소일소(一笑一少),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진다는 기쁨이 어느덧 인격과 성품이 역성장해 아이가 되어 버렸다는 회의감으로 전환이 됐다. 과연 나는 이 일을 위해 16년 동안 학교를 다녔던 것이었을까? 이 질문으로 나는 나의 인생 첫 직장을 미련 없이 박차고 나왔다. 물론 내가 대단한 공부를 했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든 등록금, 그리고 시간을 생각하면 아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취업을 하고 처음으로 있는 회식자리에 갔다. 장소는 어울리지 않게 강남에 있는 나이트클럽이었다. 대학 때 다녔던 강남의 나이트를 나이가 지극한 직장상사들과 함께 간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더 이상했던 것은 마이클잭슨의 노래가 나오자 소장님이 무대 중앙에서 네임 테그를 목에다 두른 채 아저씨다운 춤을 췄다는 사실이다. 당황스러운 춤사위를 보고 멈칫했던 혜인이랑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을 가리며 웃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야?”
“용자 납셨다.”
그리고 이내 주변의 젊은 직장 동료들에게 우리의 웃음을 전파시켰다. 그때 나에게 불같이 화낸 내 또래 젊은 남자 직원 때문에 내 뇌작동이 멈췄다. 잘게 부슨 얼음 한 통 머리에 쏟아 부은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사실 그 남자 직원의 이름을 모른다. 우리는 남자 여자 분리가 된 각기 다른 사무실에서 전화 영업을 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크게 잘못된 일을 하는 것마냥 그러면 좋냐는 식으로 따져 물었다. 내가 잘 한 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혼날 일도 아니진 않았던 것도 같은데 그 친구는 직장 상사를 대변하듯 훈계를 했다. 나는 그 때 결심을 했다. 진짜 그만둘 때가 됐다고.
그러나 나는 참으로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도서관의 열기를 띤 다른 청춘들의 에너지의 기운 속에 경쟁적 불안감이 아닌 학문의 순수한 목적으로 이곳에 함께 있다는 게 그 증거다. 나는 비로소 평온해질 수 있었다.
이 젊음의 아이러니!
마지못해 하던 그 공부가 오늘날 나의 마음의 평화를 주는 근원이 되어있을 줄이야. 나는 웃었다. 도서관 칸막이를 앞에 두고 웃었다.
아! 딴 생각~
그렇다. 나는 공부가 아닌 딴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암 괜찮고말고! 결론 자체가 ‘나는 행복하다.’는 데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그제야 나는 집에서 뽑아온 인터넷 자료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 책상 위쪽에 나란히 놓았다. 하나둘씩 지식을 쌓아가는 재미에 닿을 준비를 하니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나는 대학에서 하고도 남은 공부를 한다. 많은 논문들을 뒤적이며, 깊이 있는 학문의 세계에 빠져들며 참다운 학문의 희열을 느끼며. 스물다섯의 시간 속을 걷고 있다.
이젠 그렇게 늙어보이던 복학생들한테도 누나벌이 되어버린 나는 학교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도 이 곳이 마치 나를 위해 마련되어 있던 자리인 양 아늑함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옆 방 연구실에 있는 한 남자와 너무도 따사롭고 고요한 사랑에 빠져들었다. 꿈꿔왔던 많은 로맨스와는 상반된 이 사랑, 별 특별할 것 없어 식상하기 그지없게 시작되어 버린 이 사랑은 제자리에 머물고만 있어 보여도 뒤 돌아서면 출발점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다. 사랑인건지 사랑 같은 건지 알쏭달쏭했던 그 시작에서 우리는 지금 서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 하나를 완성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책상위의 너저분한 프린트들을 다시금 정리하고 설하의 실험실로 향했다. 학생 식당밥의 딜레마는 싼 만큼.. 배도 빨리 꺼진다는 것!
"설하야, 우리 오늘은 좀 맛있는 것 좀 먹으러 갈까?"
"......"
"뭐야?"
"나 오늘 돈 없는데."
"어, 나도 없는데. 그럼 교수 식당 정도? 어때?"
"그래, 거기로 가자."
우리의 로맨스는 현실적인 벽에 매번 이렇게 무너지고 만다.
그도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나는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의 입술의 흔들림이 참 맘에 든다. 애써 태연하려고 해도, 속일 수 없는 게 그의 입술이다.
"영~~ 너 왜 자꾸 나 뚫어지게 쳐다보냐?"
"썰~ 너 또 떨었지?"
"아닌데..."
"훗, 넌 아직도 내 얼굴 보면 떨리냐?"
“아닌데...”
“아니긴 뭘 아니야,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게, 재채기와 네 입술의 떨림이구만...”
나는 그가 나를 만나기 이전에 사귀었던 모든 여자를 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진정한 첫사랑도 안다. 나는 그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저녁시간의 교수식당은 대부분 학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3학년 말부터 나도 이곳의 출입을 하게 되었다. 학생식당과는 단가의 차이가 있는지라 아무 때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곳에 오면, 보통의 건물 스카이라운지 저리가라 하는 야경 덕에 이 곳의 가치는 학생식당과 비할 바가 아니다.
"영~ 니 좋은 자리 맡아놔, 내가 밥 타서 그리로 갈게"
"엉"
나는 노을이 보이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설하를 기다렸다.
"영, 운전은 잘 되가?"
나의 이 즐거운 자기 계발의 시간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운전면허,
"응, 선생님 너무 웃겨, 내가 운전을 너무 잘해서 옆에서 꾸벅꾸벅 존다. 뭘 믿고 졸고 있는 건지..."
"니 기능에서 떨어졌을 때, 막 열 받아서 화내고 그랬잖아. 도로 주행은 잘해."
"알았다. 이눔아 밥이나 쳐묵으라. 기능 얘기는 왜 또 꺼내는 거야? 아 진짜 그때 생각하면 또 열 받아. 주차까지 다 하고 차 빼고 나오는 길에 보도블록 위에 바퀴는 왜 걸쳐서 탈락이냐.. 어 열 받아. 그 전에 시험 본 애가 사고만 안 냈어도... 내가 잘하는 건데 걔 때문에 넘 쫄아서."
" 귀여워."
" 알아."
...... 침묵.... 또 침묵.... 그렇게 노을도 지고, 그렇게 하루가 가고,,,
그렇게 한 달이 가고....그렇게 대학원 시험날짜가 다가오고... 모든 것이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