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빌리밀리 Oct 19. 2023

준비되지 않은 이별은 더욱 아프다

내 끝에 해가 걸려 있고, 내 끝에 달이 걸려 있고 내 끌에 바람이 지나가고 그렇게 내 끝에 눈은 쌓인다. 너에게로 향해 내딛은 발길질인데 돌아오는 것이 없어 허공에 뜨기도 전에 그대로 땅바닥에 내팽겨쳐졌다. 내 끝에 네가 있고 네 끝에 내가 있던 그 날의 시소는 지금 절름발이가 되어 둘이 아닌 하나로 땅을 딛는다. 공중에 닿는 속도보다 더 빨리 땅에 떨어진다. 입속 가득 고이는 신 우물, 눈 속 가득 맺히는 찬 눈물  


나는 식음을 전폐했다. 그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픔을 견딜 수 없어 슬픔으로 토해냈다.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어 매일 저녁 친구들을 만나 위로를 받았다. 친구들의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들에게 남친과 헤어진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애를 내 안에서 비우고자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그 애로 가득 찼다. 내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은 그 애와의 추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야위어갔다. 하루 이틀 조금씩 야윈 것이 아니라 어느 날 한꺼번에 해골처럼 병약해져 있었 . 


학교를 가는 길에 전화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가방을 뒤져보면 부재중 전화가 없다는 사실에 내가 그 애를 기다리는 건 환청과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나는 전화기를 바꾸고 번호 또한 바꿨다. 더 이상 그 애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후 나는 닥치는 대로 소개팅을 해댔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모든 남자들이 예준이와 비교가 되었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가 된다고 했지만 그를 대신해 줄 남자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나는 정두 오빠를 만났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린 꽤 오래 만났다. 정두 오빠가 연락을 하면 좋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 장소에는 꼬박 만났다. 둘이 만날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주로 정두 오빠의 지인들과 함께 만났다. 학교 테니스 동아리 사람들,  고등학교 동창과 그 여자친구, 학교 동기들. 그리고 나는 그 정두 오빠의 학교 도서관에 가서 주로 공부를 했다. 사귀는 건 아니었지만 정두 오빠는 나의 많은 부분을 통제했다. 사귀는 것처럼. 가부장적인 면이 있어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안 볼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성격보다도 걸리는 건 패션 스타일이었다. 같이 다니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정두오빠를 소개해준 친구에게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한의대에서 정두오빠 정도면 진짜 세련되게 옷을 잘 입는 편이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가 안 됐다. 정두오빠를 만나는 날 커피점에 가면 거기에 있는 잡지들을 함께 보며 남자 모델들의 옷을 보여줬다. 나는 이런 스타일이 좋다고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런데 정두오빠는 나의 의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탐탁지 않은 남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예준이와 헤어진 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그것도 두 달이 되었다. 나는 내가 생각보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더 이상 울지 않았고 그냥 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게 정상 궤도로 돌아오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렇다고 믿었다. 괜찮냐고 걸려오는 친구들의 안부전화에 이상하리만큼 괜찮다고 대답했다. 친구들은 잘 됐다며 어차피 예준이는 나에게 맞지 않는 애였다고 예준이를 깎아 내렸다. 내가 한참 아깝다며 친구로서의 의리를 보여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애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나에게 돌아오면 그 때 내가 멋지게 차줘야겠다는 상상을 수없이 해댔다. 어차피 그 애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상상 속에서라도 우리의 결말은 내가 그 애를 받아주지 않은 걸로 결말을 맺고 싶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밤하늘은 그저 까만 밤일뿐이라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흑색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밤의 여인이 구름을 흩날려 축제를 뿌리면 밤하늘은 낮과 같은 하얀 밤이 되기도 하고 밤하늘이 단정한 흑빛으로 수묵화를 머금고 양떼구름을 펼치게 될  잠에 취한 사람들은 온통 어둠으로 뒤덮인 꿈을 꾼 것임을, 그들은 알 수가 없다. 밤의 여인이 클라마티스, 향을 품은 북소리를 울리면 밤은 하늘 문을 열고 나와 바다 정중앙에 고이 내려앉는다. 그 찰나에만 맺힌다는 코발트빛 밤의 눈물은 수면 위로 격렬한 피리 소리와 함께 뿜어져 오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깊은 잠에 취해 밤의 축제가 사그라드는 그 흔적마저 흘려 보낸 뒤 밤은 어둠일뿐이라고 말할 뿐이다. 잠들어 있는 영혼들은 알 수 없는 그 진실을 희미한 달빛에 싸매 날숨으로 내보낸다. 세상은 또 한 번 어두운 밤으로 얼어붙는다. 


내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채로운 일들에 대해 사람들은 밤은 밤일뿐이지 그 밖에 다른 무언가는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리고는 내가 겪은 것들은 진짜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과 다른 밤들을 봐왔다. 그날도 그랬다 어느 겨울밤. 정두 오빠와 만나고 헤어지며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내 마음 속에서 오만가지 감정들이 피리소리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은서한테 전화가 온 건. 

“은영아, 나 좀 전에 예준이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았어.” 

예준이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런데 내 전화번호가 바뀌어서 연락할 길이 없으니 내 바뀐 전화번호좀 알려달라고. 그 때 은서는 예준이한테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은영이 너 때문에 힘들만큼 힘들었으니까 그만 좀 괴롭혀!” 라고 

이 말을 들은 나는 춥고 까만 밤 집으로 가는 그 길 위에 큰 소리로 울었다. 그렇게 울면서 집까지 걸어갔다. 집에 도착한 나를 보고 병신 같다고 소리친 건 둘째 언니였다. 나한테 ‘존나’, ‘열나’와 같은 부사도 천박하다고 못쓰게 했던 언니였다. 오히려 언어에 관한 것들은 엄마 아빠보다 언니가 나서서 정화시켜줬다. 그런 언니가 나한테 남자 때문에 병신 같이 울고 있다고 화를 냈다. 병신 같다고.. 병신.. 병신이라고. 그리고 나는 정말 병신 같이 더 크게 울었다. 언니는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후려치려 했지만 내가 그 손을 낚아 챘고 또 다른 한 손이 날아오는 것을 또 한 번 잡았다. 언니는

“어~ 어~” 

하며 당황해했다. 힘으로는 다섯 살 어린 동생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던 모양이다.

작가의 이전글 50000이 아닌 50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